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대가들의 작품을 조망하는 대형 회고전을 꾸준히 개최해왔다.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은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50여년의 화업을 통해 독창적인 표현의 추상회화를 개척한 윤명로(尹明老, 1936~)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이다.
윤명로는 1960년대 격정적인 앵포르멜 추상회화 연작과 인간과 사회구조의 붕괴와 혼동을 갈라짐과 터짐의 물리적인 현상으로 표현했던 1970년대의 < 균열> 연작을 통해 독자적인 표현을 찾기 위한 치열한 형식 실험기를 거친다. 1980년대 < 얼레짓>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사물과 행위를 결합시킨 단어를 통해 전통적인 미감의 현대적 표현 가능성을 탐구하였으며, 1990년대 < 익명의 땅> 연작에서는 거대한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거대한 화폭에 분출시키며 드라마틱한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2000년대에 선보인 < 겸재예찬> 연작은 작가를 둘러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와 명상, 운필(運筆)의 충만한 기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무위(無爲)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현재의 완숙한 추상회화까지 연결되고 있다.
윤명로는 육체와 정신의 깊은 곳에 켜켜이 각인된 사유의 흔적들을 외부로 발화(發花)시키며 끊임없는 변모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탄생과 성장, 격정과 분출, 성숙과 관조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끝없는 열정과 굳은 의지, 이를 뒷받침하는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변화의 열망을 창작의 에너지 삼아 자신을 담금질하며 독자적인 추상 회화의 세계를 구축한 오롯한 작가 정신의 증거물이다.
1960년대
1960년대 윤명로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한국미술계를 휩쓸었던 앵포르멜 추상회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의 소설 『벽』을 모티브로 제작한 < 벽A> (1959), 파리 청년비엔날레에 출품했던 < 회화 M.10> (1963), 절규하는 사람 형상의 < 문신 64-1> 등은 어두운 색채와 재료의 물질감이 두드러지는 초기 대표작들이다. 그의 초기작업은 < 원죄> , < 석기시대> , < 문신> 등의 제목을 지니고 있다. 이는 기존의 질서나 양식에 대한 부정, 알 수 없는 미답의 세계, 주술적이고 원생적인 뿌리에 대한 동경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윤명로는 음울하고 피폐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치열하게 고뇌하며, 앵포르멜 추상회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1. 회화M.10, 1963, Silver painting, plaster and oil on linen, 162x132cm, Leeum,Samsung Museum of Art
2. 문신 64-1_1964_Oil and plaster on linen_116.5x91cm_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3. 원죄B_1961_Copper pllate and oil on panel_91.5x122cm_Courtesy of the artist
1970년대
< 자> 와 < 균열> 연작은 1960년대에 시도했던 표현적인 추상회화의 격렬한 감정적 제스처가 가라앉고 엄격한 화면구성과 옅은 청회색과 흰색 등 단색조의 기하학적 형태감을 드러낸다. 윤명로는 ‘자’가 세상의 규범과 질서를 상징하며, 규범과 질서가 붕괴되는 현실적 상황을 녹아내리고 부서지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후 작가는 < 자> 연작의 제작 과정에서 나타난 화학적이며 물리적인 균열 현상을 이용하여 비의도적이며 우연적인 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 균열> 연작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우연성과 비의도성에 숨겨진 작가의 치밀한 구성 의도를 보여준다. 작품의 표면을 가득 채운 물리적인 ‘균열’ 현상은 작가의 세심한 의도 하에 배치된 것이다.
1. 자 V-VXVII_1974_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_130x130cm_Courtesy of the artist
2. 균열 77-710, 1977, 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_120x135.5cm, Courtesy of the artist
3. 균열 76-421_1976_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_129.8x96.5cm_Courtesy of the artist
1980년대
1980년대 작가는 < 얼레짓> 연작을 발표하였다. ‘얼레짓’은 연실을 감는 ‘얼레’와 ‘얼레빗’ 그리고 행위 명사 ‘짓’을 합성한 단어이다. < 얼레짓> 연작은 70년대 < 균열> 연작에서 강조되던 물질적인 현상의 우연성과 대비되는 신체의 반복에 의한 적극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과 먹을 이용하여 촘촘한 빗질 같은 선으로 면을 구축하듯 쌓아올리며 전면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반복적인 붓질은 여러 겹의 층을 형성하며, 꽉 짜인 그물망 같이 얽히고설킨 단단한 표면을 구축한다. 80년대 중반 이후의 < 얼레짓> 연작은 마치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를 연상시키는 듯한 비워진 공간의 구성과 무심한 듯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자유로운 선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기운을 보여준다.
1. 84-425_1984_Acrylic and india ink on cotton_83x130cm, Courtesy of the artist
2. 얼레짓 85515_1985, Acrylic, india ink on cotton_ 181x222cm, Courtesy of the artist
3. 얼레짓 86-625_1986, Acrylic and india ink on cotton_160x227cm,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1990년대
윤명로는 1990년 충북 부강의 대형 창고에서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다. 거대한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느꼈던 경외감을 작가는 커다란 화폭을 대지 삼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이는 마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격렬한 표현욕구가 원시 자연의 기운을 통해 거대한 캔버스 위에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 듯 보였다. 작가는 미지의 대지에 뛰어든 탐험가처럼 거대한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원시 자연의 광폭한 생명력을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그가 표현해 낸 ‘익명의 땅’은 태초의 대지가 꿈틀거리며 만들어 낸 거대한 산맥의 단단한 뼈대를 역동적으로 솟구치며 포말을 일으키는 생명의 파도의 기운을 담고 있다.
익명의 땅 91630, 1991, Oil and acrylic on cotton, 248.5x333x(4)cm,_Courtesy of the artist
2000년대, 그 이후
2000년대에 선보인 < 겸재예찬> 은 < 익명의 땅> 연작이 보여주던 격렬한 에너지가 가라앉고 보다 여유로워진 듯 관조적이며, 명상적인 추상회화를 보여준다. 작가는 리넨이나 면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후, 바인더에 갠 고운 쇳가루를 붓과 나이프, 그리고 이를 닦아내는 헝겊으로 이미지를 그려나간다. 짙은 회색의 철가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기와 반응하며 산화되면서 미묘한 색채의 변화를 일으킨다. 윤명로는 < 겸재예찬> 연작 이후 ‘조망’, ‘숨결’, ‘바람 부는 날’, ‘겨울에서 봄으로’, ‘고원에서’ 등 자연의 고유한 특성과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추상 회화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윤명로의 최근작들은 의도적인 표현을 뛰어 넘어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 듯한 완숙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고원에서 MXII-0103, 2012, Acrylic, iridescence on linen, 228x333x(2)cm, Courtesy of the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