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의 역습, 순수미술의 반격”
로봇들이 우리 전통 부채춤을 추고, 종묘제례악을 연주한다. 군무를 추고 때로는 그 유명한 난타를 연주하기도 한다. 테크놀로지와 문화의 만남의 결과다. 로봇들이 어설픈 동작들로 우리의 행동들을 따라 하는 것이 마냥 신기해 보이고 오히려 그 어설픈 동작들이 더 인간적인 감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설픈 동작을 위해서 정말 최첨단이라고 할만한 기술이 필요하다.
부채춤이나 종묘제례악의 동작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동작이 실현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하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로봇 기술까지 그 중 무엇 하나라도 빠진다면 위의 쇼들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동작을 연구하는 작업은 역사나 음악과 같은 인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고, 로봇을 작동시키는 것은 테크놀로지와 같은 이공학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요즘 이렇게 이 둘의 거리를 좁히다 못해 같이 무엇인가 창조해 내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른바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융합의 시대다.
위의 로봇들의 부채춤과 종묘제례악 연주를 연출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대표이자 본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전병삼 작가는 이렇게 융합의 한 가운데 서있는 자신의 상상력이 바로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로봇이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3D 프린터에서 조각작품이 만들어져 나오는 등 마치 테크놀로지가 공격하고 순수미술이 그것에 반격하는 것과
같은 다이내믹한 장면이 연출될 예정이다.
“융합! 대중의 공간에서 만난 회화“
높은 빌딩과 아파트 공사 현장을 보면 언제나 안전을 위한 울타리가 높게 길게 쳐있다. 처음에 그 울타리들은 삭막한 공사장 못지 않게 회색 빛깔의 철재 그 자체로 울타리 역할만 해오다 언제부턴가 울타리의 기능을 넘어서 거리의 환경을 미화할 수 있는 역할로 발전했다. 이른바 그 지역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 도시의 캔버스가 되었다.
그 도시 캔버스에는 빌딩 공사 측의 의지를 반영하는 메시지라든지 그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지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문화 게시판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공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표현해 온 작가가 이호진 작가다. 그는 다소 어려울 것 같은 색채 추상회화를 그 커다란 공사장 울타리에 그리면서 색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장식적인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작가의 추상회화는 넓은 울타리와 대중의 공간이라고 하는 특성과 융합하면서 단순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색 그 자체가 주는 편안한 느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게 된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대중의 공간에서 느꼈던 그 색채 추상의 편안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테크놀로지에서 미술로, 미술에서 대중의 공간으로
본 전시는 뉴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문화 기획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병삼 작가와 공공의 공간에서 회화의 공간 확장 작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호진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전시다. 뉴 테크놀로지의 결합과 회화의 새로운 개념적 해석을 통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Post-human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하거나 인간의 몸에 로봇과 같은 기술들을 접합하여 인간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키고 생명연장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미래형 인간의 모습들을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Post ? Fine Art 는 현대미술의 전통성과 순수성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발전된 기술과 새로운 조형요소들로 현대 미술과 융합하여 또 다른 가능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나 Post?human은 인간의 몸에 물리적인 변형을 가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것은 아니다. Post-fine art 역시 발전된 시대의 기술력을 통한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의 해석이지 미술이 지니고 있는 정통성과 순수성의 변형은 아니다. 비인간적인 몸을 통해 더욱 더 인간성을 고수하려는 것처럼 전통적이지 못한 비미술적 재료와 기술력이 오히려 더 본래 미술이 지니고 있는 소통과 감상의 순수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Post-fine art를 통해 동시대의 인간성에 관한 소통 그리고 미술 본연의 기능에 대한 원론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본 전시에는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을 미술과 융합하고 반대로 순수한 미술의 조형언어를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그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융합이 공존한다.
영원의 생명을 위해 로봇이 되고자 하는 인간, 인간이 되고자 하는 로봇
아이러니 하게도 최첨단의 기술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지는 (이는 가히 창조라고 해도 될만하다) 로봇은 아직까지 그 움직임이나 행동의 다양성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결국 인간 행동을 모방하여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로봇은 여전히 유기체들의 그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인체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원리들이 속속히 연구되면서 포스트 휴먼, 즉 인간의 몸을 대체할 기술력들은 발전의 발전을 가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인간은 로봇을 이용하여 생명 연장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고 로봇 기술은 얼마나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여 인간에 가까워 질 수 있느냐 하는 방향성이다. 생명을 지닌 인간의 몸의 대체와 로봇 그 자체가 인간의 생명을 모방하려는 이 역방향의 발전은 어쩌면 생명의 존엄과 인간성의 존속을 위한 당연한 균형의 조건이지 않을까.
“디지로그”,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 : 전병삼
로봇과 뉴 미디어를 통해 매체와 예술의 융합을 꾀하고 있는 전병삼 작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목시킨 “디지로그”라는 개념이 어울릴 정도로 고도의 디지털화 기술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이지만 보여지는 것은 오히려 아날로그의 감성이 충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기존에 다양한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된 로봇기술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로봇 부채춤, 로봇난타, 로봇 태권도 등 로봇과 문화 컨텐츠를 결합한 작업을 기획해 왔던 전병삼 작가의 테크놀로지와 예술적 상상력의 결합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공공간의 회화적 확장 : 이호진
일반적으로 벽화는 정보전달이나 벽화를 의뢰하는 기관이나 업체들의 홍보성 이벤트의 결과물과 같이 목적이 명확한 일종의 장식적 효과가 농후한 작업이다. 이호진 작가는 이러한 벽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없앴다. 간단히 말해 그의 벽화는 회화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의 회화는 작업하고 있는 공간의 특성에 대한 해석과 그 결과로 생성된 이미지를 통해 끊임없이 증식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회화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공의 공간을 작업 대상으로 선택했던 이호진 작가의 회화는 이제 다시 반대로 여느 회화 작품처럼 응축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벽화와 같이 큰 공간에 펼쳐진 작품에 대한 감상은 말 그대로 순간순간 떠 오르는 데로 보고 느끼면 된다. 그러나 그 공간을 해석하고 그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 대중들의 생각들을 긴밀하게 연구했던 경험은 다시 여느 회화의 형식을 빌어 응축적으로 감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미술은 여전히 작가가 디자인한 작은 우주로서 관객들과 소통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전시는 이렇게 과학에서 미술로, 미술에서 대중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