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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뉴스

안양천의 조화로운 풍경을 꿈꾸며

2011-10-25


인간의 문명이 강에서 시작되고, 수많은 도시들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듯이, 서울 역시 한강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강은 동남북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품고 서울 시내를 관통하며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글, 사진 | 이옥분 d-페다고지 책임연구원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개천에서 물장구치며 고기 잡고, 빨래하던 어린 시절, 혹은 산업화의 가파른 길목에서 도로나 주차장으로 복개되어 없어져 버린 실개천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 때 사라져 버렸던 그 개천들, 산업화의 여파로 검게 변했던 그 개천들이 예전의 깨끗한 물과 고기떼, 풀과 나무를 담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풍경을 접하고 있다.

안양천 역시 산업화와 도시화의 이름을 지나, 다시 활기찬 일상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한강의 큰 지류인 안양천은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군포, 안양, 광명을 지나 구로와 목동을 거쳐 흘러가며, 그 역사 속에 서울과 근교 시민들의 살가운 삶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안양천은 시대의 문화와 경제 등 무수한 여건들이 마주하는 삶의 공간으로 지역의 역사와 풍경을 만들어 가며 오늘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삶과 밀착된 세계로서의 물

안양천은 원래 큰 하천이란 뜻에서 ‘대천(大川)’이라 불리다가, 고려 태조가 건립한 ‘안양사’라는 사찰의 이름을 딴 ‘안양천’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안양이라는 말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가다듬어 기른다는 뜻으로, 불가에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 ‘극락세계’를 말한다. 안양은 이처럼 극락 같은 세상을 바라는 선조들의 기원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흐르는 안양천은 태조가 염원하는 극락세계의 풍경을 그려내듯이 물이 풍부하고 깨끗해서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천렵장소로, 빨래와 목욕터로, 아이들의 놀이 장소로 모든 생명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안양천 하류인 목동 일대는 말 방목장으로 유명할 만큼 갈대와 목초가 잘 자라는 곳이었으며, 한강과 만나는 하구는 경기 이남지역, 인천과 수원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삶 속에서 물은 생명과 문명 그 이상의 존재였다. 강은 갈수기와 홍수기를 넘나들며 생명이 나고 길러지는 터전이자 사색과 철학이 움트는 곳이었다. 또한 물은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존재와 품성, 지혜, 삶의 원리 등 정신적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경외의 대상이자 신성한 존재였다. 우물물 한 그릇을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를 염원할 때, 그 물은 절대자에게 바치는 가진 것 전부의 지순한 정성이었으며,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함은 깨끗함을 삶의 지표로 비춰주는 물이었고,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는 말은 물처럼 순리대로 흘러가라는 삶의 지침을 주는 지혜였다. 이렇듯 물은 인간과 자연이 제각기의 삶을 영위하는 생명의 장으로서, 조화와 공생이 깃든 곳으로서, 인간에게 삶의 거울이자 지표가 되었다.

삶과의 분리, 하천의 근대화

20세기 초까지도 안양은 서울 근교의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농촌이었고, 안양 시내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흘러가는 안양천은 뱀이 기어가는 모양으로 굴곡이 심한 사행하천이었다. 이렇게 유유자적 흐르던 안양천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했다. 철도가 들어서면서 근대적 산업시설을 갖춘 공장이 들어섰고, 안양은 점차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1930년 조선직물이 들어선 이후 조선견직, 제일방직, 금성방직, 삼덕제지 등이 설립되면서, 안양은 섬유와 제지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기계, 전기전자산업, 화학 등의 공장이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군포공단, 안양공단, 구로공단 등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공장이 속속 지어지고 노동자가 모여들면서 천변 일대 지역은 빠르게 변화했고, 이와 함께 안양천도 달라졌다. 수많은 공장들은 안양천의 풍부하고 깨끗한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했고, 공장들은 용수를 공급한 발원지로 다시금 공장의 폐수를 흘러 보냈다. 이 과정에서 안양천은 사람들과 멀어지며 물과 강이 지닌 상징과 이야기, 신성성의 지위를 잃고 단지 삶을 위한 기능적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는 “삼덕제지공장 주변일대 우물에 유독 폐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3만여 주민들이 음료수로 삼고 있는 우물물이 공장에서 배출하는 유독성 폐수에 오염되었다”는 기사였다. 또한 “하루 수십 만석의 물을 써 버리는 공장들 때문에 우물을 깊이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기사는 산업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안양천이 이미 오염되고 말라가는 사실, 그리고 물이 사람에게 주는 이로움을 떠나, 특정 산업에서의 생산력을 올려 주는 주된 도구가 되어 가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록 산업화를 위해 자연의 파괴를 서슴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지라도, 자연과 사람은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받아들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 왔다. 60년대 안양천 둑에는 누르스름한 종이조각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주변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에 종이 찌꺼기가 섞여 있어서 인근 주민들이 물을 막고 폐지 찌꺼기를 걸러내어 김처럼 체에 떠 놓은 것이었다. 둑에 펼쳐진 이 누런 마분지 풍경은 물이 생명을 잉태하는 힘을 잃었을지라도 인근 주민들의 생계를 이어주던 자연의 힘이었으리라.

공장의 난립과 폐수 방출은 더욱 극심해져 인근 마을까지 폐수가 유입되어 못자리가 썩는 등 하천과 마을의 오염은 날로 심각해졌다. 1968년 최초로 하천 오염도 조사가 실시된 이후 70년 측정한 오염치에서 안양천(672ppm), 청계천(700ppm), 우이천(946ppm) 세 곳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오염도를 기록했다. 75년 8월 26일자 경인일보는 “각종 폐수가 썩어 악취를 풍기며 이에 주민들이 불안해 할 뿐 아니라, 버스나 열차를 타고 이 지점을 지나는 승객들마저 악취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고 있어 마치 공해와 방역의 무방비 지대를 방불케 한다”고 쓰고 있다. 안양천은 산업화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년 사이 더럽고 시큼한 공단의 냄새를 품은 꺼려지는 곳, 오염하천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1977년 안양천은 300여명 인명 피해와 수백억의 재산 피해를 가져 온 대홍수를 겪으며 일대 변화를 맞게 되었다.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시가지의 모든 땅은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콘크리트로 덮였고, 큰 비가 오면 그 물이 하천으로 모여 홍수가 빈번해졌다. 이미 60년대 중 후반부터 마을마다 흐르던 소하천은 홍수 예방을 위해 석축을 쌓는 정도에서 정비가 이루어져 왔으나, 대홍수를 계기로 홍수 관리, 호안공사, 고수부지 정비, 하수처리장의 건설 등 하천의 이수와 치수 기능을 위한 체계적인 정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를 보면, “강거(江居)는 계거(溪居)만 못하고, 계거는 산거(山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홍수 위험에 따른 주거의 불안정을 이야기 한 것이다. 우리네 선조가 은유적으로 지적한 이러한 홍수의 위험을 고려하면서 도시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애초부터 물난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홍수를 계기로 안양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정부는 콘크리트로 둑을 쌓아 사행하천을 곧게 펼쳤고, 축조된 제방이 안전하게 홍수에 버틸 수 있도록 비탈면에는 시멘트로 된 호안블럭과 잔디를 심었다. 동물구멍 등 제방을 붕괴시키는 요인을 없애기 위해 풀을 정기적으로 제거하고, 유수의 흐름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를 대비해 나무를 심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도 만들었다. 하천을 직선으로 만드는 것을 직강화(直江化)라고 하는데, 홍수가 발생할 때 물을 빠르게 배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비 방식은 홍수를 막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생태계의 파괴 문제를 야기했다. 하도가 직선으로 단순화되면 흐르는 물속의 생태계도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하천 단면을 콘크리트 안벽으로 수직화시키면서 생겨난 반듯한 땅은 도로나 주차장을 만들었다.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에 따라 교통량이 많아지다 보니 이에 따른 도로의 확장 대책으로 하천 연안은 적격이었다. 원래 하천의 양안에는 자연스러운 도로가 있었는데 이것을 도시 간선도로나 고속도로로 확대하면서, 하천폭이 넓은 곳을 제외하고 웬만한 개울은 뚜껑을 덮어 비좁은 도시의 유용한 공간으로 활용했다. 도로로 만들거나 일부 구간에서는 비교적 넓은 하천도 복개하여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넓게 또는 좁게 도시를 실핏줄처럼 잇고 있는 하천은 철저하게 도시의 성장과 생활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산업화 이전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의 하천은 더러웠다.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물의 오염과 인위적인 정비작업은 자연적으로 정화될 수 없는 수준으로, 예전과는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폐수가 섞인 오염된 물이 그대로 한강으로 유입되면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수돗물이 중금속에 오염되어 발암 물질이 검출되는 등 강의 오염은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1992년부터 하수처리장을 가동하고, 강 양편에 하수관로를 묻어 생활하수와 공장폐수를 하수관을 통해 강 하류로 보내 한강 수질을 보전하는 작업이 실시됨으로써 수질이 다소 개선되었으나 동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다시 삶 속으로,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


90년대 중반에 들어와 안양천의 수질이 개선되고, 둔치에는 농구장, 롤러스케이트 등의 체육공원, 자연학습장과 야외무대,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 등이 꾸며지면서 강가는 다시 시민의 휴식공간이자 놀이 공간으로 돌아왔다. 일종의 하천 공원화 사업을 통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여러 시설물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음껏 물을 즐길 수 있는 강이 아니었으며, 모든 생명이 함께 반기는 곳은 아직 아니었다.

안양천을 모든 생명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자연에 가깝게 되돌리기 위한 실천은 2001년 “안양천 살리기 네트워크”가 조직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네트워크는 90년대 중반부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직강하천과 시멘트로 황량해진 강변, 하천 복개와 고수부지 활용 등 그간의 하천 이용에 대한 반성과 보존을 주장하며 일어났던 산발적인 운동들이 하나의 조직체로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 단체는 이후 생태 하천으로의 복원을 실천하는 구심체가 되었다.

자연형 하천조성사업은 기존의 큰 뚝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물줄기를 자연형태로 복원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이 사업은 기존의 콘크리트 블록을 걷어내고 수생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도로와 주차장, 무분별하게 들어선 체육시설도 정비하고, 하천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등이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비과정을 거쳐 안양천의 도심 중심부를 관통하는 유역이 넓은 구간에는 하천 양안을 연결하는 다리와 농구장 등의 체육시설, 그늘막과 의자, 그리고 자투리 공간에는 돌길 등의 인위적인 구조물이 설치되었고, 하천 유역이 좁은 상류 쪽은 대부분 산책로와 자전거 길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환경 조성은 원래의 자연 하천에 가깝게 되돌려 생물 서식처를 복원하며, 생활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하천이 도시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하수도가 아닌, 삶의 풍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경관 요소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산이나 강, 바다의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경치라고 말하는데 비해, 경관이란 이러한 자연적 요소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지역의 특성을 아울러 말할 때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도시의 경관은 산과 하천, 건물과 도로, 공원과 녹지 등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이룬 그 도시만의 고유한 풍경이라는 것이다. 도시의 경관을 형성하는 요소 중 특히 하천은 복잡한 도시의 숨통을 틔어 주는 비어있는 공간, 열린 공간으로 자리한다. 물을 보는 것만으로 또는 깨끗한 강가를 따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도심의 일상은 훨씬 여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물이 우리에게 지닌 의미, 즉 사색의 장, 명경지수로서의 물, 물과 같은 삶 등의 은유를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결과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시민들의 의지, 행정, 그리고 바꾸면 바꾸는 대로 묵묵히 되살아나는 자연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안양천은 사람들 곁에서, 일상적 삶의 공간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풍경은 하천 자체에만 매달려 건물과 초록과 시설물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조화로움을 그려내지 못하는 것 같다.


구간마다 차이가 있지만 안양천은 깔끔하게 구획된 녹지 공간과 자전거 길, 그리고 여러 시설물들이 제각각 잘 정비된 공원이라는 인상이 강하여 자연스러운 물줄기가 가려지는 듯 하다. 뚝을 따라 곧게 늘어선 아파트의 딱딱한 선, 초지의 초록과 확연한 경계를 이루는 붉고 푸른색의 굵고 강한 띠, 들쭉날쭉한 물가의 여린 선, 이 여러 종류의 선들이 눈에 거슬려서일까? 단조롭고 굵은 선의 느낌은 초록이 만든 자유분방하고 여린 선의 느낌을 압도하는 듯 하다. 특히 붉은 색 자전거 길과 청록색 산책로는 보색 대비를 이루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며 자연스러운 물가의 풍경과 대치된다. 이는 사람과 자연의 공간을 확고하게 경계짓는,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거북함으로 다가온다.

여러 도시의 중심부와 경계부를 지나 길게 흘러가는 안양천변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이들에게 잘 닦인 자전거 길은 필요한 것이지만, 길의 형태와 색채는 물가로 향하는 시선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흙을 닮은 길의 색과 작은 자전거 그림 표시만으로도 이 길의 사용에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래의 사진처럼 자연스러움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자전거 길을 빌어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물가의 풍경이 가급적 자연 그대로 유지되도록 관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하는데 있다. 가급적 인위적인 구조물의 설치를 피해 초록의 싱그러움과 물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곳, 모든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울리는 풍경의 멋이 있는 곳, 이러한 풍경 속에서 이 곳을 말하게 하는 독특한 언어가 생겨나지 않을까? 더 나아가 과거의 우리 삶에서 물이 지니고 있었던 정서적 아름다움, 생명을 길러내는 공간으로서의 경건함, 그리고 삶의 원리와 철학이 탄생하는 품격이 오늘날 이 곳에서도 재현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보기에 잘 가꾸어진 쾌적한 공원이기보다는 색색의 초목과 갖가지 미물들이 경합하면서 공존하는 생명의 찬란함, 생명의 율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곳, 청명한 물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울리며 자라는 정서와 감각, 그런 곳이 우리 삶의 풍경을 아름답게 하는 물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참고문헌
권순국 외, 사람과 물, 서울대출판문화원, 2008
안양시사편찬위원회, 안양시사 1/4/8권, 2008
이규목, 한국의 도시경관, 열화당, 2002
홍성태, 한국의 근대화와 물, 한울, 2006
하천과 문화, 2007/7월호, 안양천의 역사와 문화
조선일보, 1959/5/31, 우물에 유독 폐수
조선일보, 1977/7/20, 3백여명 인명 피해, 수백억 재산 피해
중촌량부, 풍경의 쾌락, 효형,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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