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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을 돌아보다

2012-01-02


서울에는 많은 광장이 있다. 서울시가 디자인 서울을 표방한 이후, 여러 광장들이 서울에 더해졌고, 지금 이 광장들은 우리에게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많은 광장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광장인 서울광장을 다시 돌아본다. 100년의 역사, 문화의 장이 된 현재, 그리고 광장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하고 싶은 미래에 대해서.

글 | 강미정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太平路) 1가 서울시청 앞 광장. 지난 40여 년 간 자동차의 원활한 흐름만을 위해 존재하던 이 광장에 2004년 타원형 잔디광장과 바닥분수가 조성됨으로써, 이곳은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청마루의 보름달을 콘셉트로 한 타원형 잔디광장의 48개 조명등은 밤이 되면 주변 빌딩들의 조명들과 함께 도시의 밤을 밝힌다. 서울광장은 주변에 횡단보도를 설치하여 문화행사와 축제가 진행될 때 이동이 편하게 설계 되었으며, 여름에는 바닥 분수,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을 운영하여 시민들의 여가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이런 서울광장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담긴 지난 100년간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이 광장과 그 주변에는 19세기 말 최초의 근대 국가인 대한제국 설립에서부터 식민지 역사와 민족 전쟁,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성장에 이르기까지 이곳 서울을 지키던, 그리고 지금도 서울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녹아 있다.


대한문 앞 광장 - 근대 국가의 상징

서울광장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을 자양분으로 탄생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시작되던 때는 국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정치역학 속에서 왕권을 존속시켜나가야 하는 험난한 시기였다. 고종은 열강들의 세력균형 속에서 동아시아 황제국가, 특히 중국(明)의 전통적인 방식과 서구의 근대적인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열강의 대사관들이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본궁으로 삼아 대한제국을 출범시켰으며, 독립적인 황제국을 상징하는 환구단을 대한문 앞에 세워 군주국로서의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동시에 독립문을 세우고, 서양식 건축물을 장려하였으며 서울에 전차를 운영하는 등 근대적인 도시 발전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근대적인 문명 뿐 아니라 근대적 의식을 보여주는 기획으로 ‘공민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건설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궁궐 동편의 을지로, 소공로, 서소문로 등 방사선형 도로가 수렴되는 대한문 앞의 넓은 공간은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적합한 집회 장소인 광장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광장의 위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반영한 직선형 도로를 벗어나 중앙집권적 권력을 상징하는 방사선 형태의 중심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광장을 건설하려 했던 고종의 의도다. 황국으로서 주권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하는 ‘독립 의지’와 더불어, 고종이 추구했던 또 하나의 가치는 바로 황권과 민권의 직접적 소통이었다. 왕권약화와 그로 인한 국가의 쇠퇴를 경험한 고종에게 있어, 대한제국의 승리와 번영은 곧 황권의 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민권과의 소통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공개적으로 거행한 것 역시 황권을 민심의 기반 위에 세우고 싶었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백성들은 대한문 앞 에서 황제에게 단체 상소를 올리고 집회를 열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일본 측 협박에 못 이겨 맺어졌다는 사실을 안 백성들이 대한문 앞 광장에 모여 항의 행사를 가졌으며, 복각상소(궁전을 향하여 절하고, 황제에게 직소하는 것)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현재의 서울광장, 당시의 대한문 앞 광장의 탄생은 애초부터 지극히 ‘정치적’이었으며, 적어도 최고위 권력층과 신민간의 직접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장소를 의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광장의 기능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시발점이었고,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그 본질을 발현시켜왔다. 심지어 국권을 침탈당한 일제 강점기에도 고종의 의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 광장의 시련과 마비


대한문 앞이 시민 광장으로 조성된 가장 큰 이유로 방사선형 도로의 중심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각 장소에서 쉽게 모이거나 흩어질 수 있으며, 주요 장소와의 접근성이 높아 대규모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이 광장에서는 일본의 국권침탈로부터 고종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군중집회가 일어났다. 대한문 앞 광장, 지금의 서울광장의 진정한 탄생은 바로 일본에 대한 저항,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시민들의 열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강제 한일합방 이후, 고종의 독살설이 무성한 가운데 이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한문 앞 광장은 진정한 광장으로서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총독부와 대한문 앞 경성일보 자리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경성부청사(구 서울시청사)를 세워 그들의 식민통치 야욕을 더욱 강화하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을 통치하던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을 빌려와 그들의 독재적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했던 것이었다. 일본은 곳곳에 이러한 양식의 주요 행정기관들을 지어,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한편 일본 군국주의의 권위를 표현했다. 특히 경성부청사 위치가 ‘전 시가를 원으로 볼 때, 그 중심 위치에 부청을 두겠다’는 원칙하에 세워졌음을 볼 때, 당시에도 이 광장은 도심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일본은 조선 식민지 지배에 적합하도록 실시된 도시계획(1912)에 따라 도로 정비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대한문 앞 태평로는 조선총독부에서부터 경운궁, 그리고 서울역을 잇는 도로로 정비되어 확장되었으며 환구단의 절반 이상이 철도호텔(현 조선웨스턴호텔)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 틈에서 자리를 지켜온 대한문 앞, 그리고 일본에 의해 조성된 태평로를 포함한 경성부청사 앞 광장은 8.15 해방 이 후 다시 국가의 독립을 염원한 민의의 광장으로 돌아왔다.


산업화로도 막을 수 없었던 광장의 본능


36년간 닫혀있던 광장은 일제의 패망 이후 다시 민중의 품으로 돌아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서울광장은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의 기쁨을 공유하던 장소로서,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던 저항의 장소로서 꾸준히 제 기능을 다했다. 하지만 이 광장은 곧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성장’의 논리를 내세운 위기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생존을 위한 경제성장이 절실했고,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도시는 선이다’라는 구호를 내걸며 폐허가 된 서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약 20여 년간 서울의 모든 도로가 확장되고 이를 중심으로 높은 건물들과 아파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서는 건설 드라이브가 이어졌다. 특히 미군정의 원조를 물적 기반으로 지어진 대부분의 건물들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사각형의 모더니즘(국제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기능과 효율만을 최우선가치로 내세우는 근대적 양식의 건물은 양적 성장이라도 급히 지향했던 한국의 성장 정책과 부합되는 코드였다. 그러나 자본, 시간, 인력, 전문가도 없이 한쪽은 건설하고, 한쪽은 부수는 일을 함께 진행하였으므로 체계적으로 도시를 계획할 수는 없었다. 서울광장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산업화 이후 급속히 늘어난 승용차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태평로가 확장되고 로터리 도로가 생겨났으며, 서울광장 중심에는 분수대가 건설되었다. 백성과의 소통을 염원했던 고종 황제의 열망으로 탄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기에도 민의 발현의 최전방으로 이용되었던 광장이 산업화의 열망 앞에서 도로로 탈바꿈된 것이다.

도로의 변화와 더불어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모더니즘 양식의 프라자 호텔, 프레지던트 호텔, 조선호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손정목이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밝힌 대로 ‘66년 한국을 방한한 미국 존슨대통령의 축하행사가 서울광장에서 진행되었고, 시청 앞에서부터 남산 중턱까지 이르는 슬럼지대가 세계적으로 전파를 타게 되었다. 이후 시청 앞에는 모더니즘 양식의 프라자 호텔이 지어졌다’는 사실은 한 도시의 면모가 참으로 다양한 이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서울광장의 광장으로서의 역할은 산업화 앞에서도 상실되지 않았다. 로터리로 사용되어야 할 서울시청 앞이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와 독재 저항 집회의 주 무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장으로서의 서울시청 앞 공간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100만 명의 군중이 몰렸던 87년에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6월 항쟁은 ‘광장의 의미’를 가장 폭발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진 한 장이 그 당시의 광장이 대한민국의 민주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 이한열 학생의 운구와 초상, 그리고 군중의 요구가 함성 치던 이 광장에서 6.29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탄생했고, 대한민국은 긴 군부 독재의 막을 내리는 쾌거를 이룬다.


광장의 또 다른 얼굴, ‘문화와 축제의 광장’

이렇게 민주화를 이루어 낸 뜨거웠던 6월 항쟁 이후, 광장은 또 한 번의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은 수백만의 국민들이 한 장소에서, 하나의 옷을 입고, 하나의 구호를 외치도록 만들었다. 이 현상은 곧 전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고, 우리에게 광장의 새로운 의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국민은 물론 정부 역시 광장의 문화적 필요성에 대해 적어도 더 이상 외면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경찰의 질서 유지 아래 광장으로 사용되었던 서울시청 앞 ‘로타리’가 이제는 정식으로 잔디와 분수가 어우러진 광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정부는 서울 중심 지역에 광장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고, 2004년 이 광장은 잔디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서울 광장은 또 한 번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2010년부터 신시청사가 옛 청사 뒤에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옥 처마 형상을 닮아 유기적 형태로 보이는 이 건축물은 7, 80년대 한국에 지어졌던 네모반듯한 국제주의 양식 건물들과 달리, 조형적 요소를 활용하여 상징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건물이다. 최신 양식의 고층 청사는 2012년 5월이면 완공될 예정이다.


이 광장은 지금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100여 년간 사람들의 호소와 통곡, 저항의 외침, 환호의 함성으로 채워지고 비워지던 그 시절을 거쳐 이제는 우아하게 다듬어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고 할까. 서울시에서는 매년 광장에서 다양한 문화축제를 열고, 초파일에는 부처님께 탑을, 성탄절에는 예수님께 트리를 세워드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국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서울광장은 그 험난하고 격정적인 시기를 지나 먼 길을 걸어온 누님처럼 평화로운 표정으로만 머물러 있는 듯하다.

올해도 서울광장에는 스케이트장이 운영되고 있다. 도심 한 가운데서의 스케이팅, 반짝이는 도심의 네온 속, 환상 같은 트리의 불빛 속에서 깔깔대며 빙판을 미끄러지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친구, 연인, 가족들이 눈에 띤다. 하지만 이 즐거운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은 내년부터 예산 문제로 전면 재검토 되어, 이런 관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졌다. 이즈음에서 매년 겨울, 50일 동안 스케이트를 타지 않는다면 더 ‘광장다운’ 광장을 시민들이 참여하는 장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본다. 잔디가 자라고, 콘서트가 열리는 시대의 변화가 가져온 문화광장의 기능과 더불어 하버마스가 주장한 ‘사적개인으로서의 공중이 논의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마당’, 그런 광장의 그 본성대로 말이다.


나는 광장이다



대한문 앞 광장, 지금의 서울광장 중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조선 왕조의 마지막 궁궐인 경운궁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간직한 건물들이 병풍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를 펼쳐 보이고 있다. 고종 황제가 본궁으로 삼았던 덕수궁 동문인 대한문, 그 맞은편에 독립국가를 상징했던 환구단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했던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는 현재의 시청사와 산업화시대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이 첩첩이 포개져 있다. 마지막으로 내년에 드러날 최신의 포스트모더니즘 새 청사까지. 마치 건축의 프라하 프리즘(한 번 세워진 어떤 스타일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스타일이 겹치면서 이루어진 역사적 축적)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이 광장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지난 100년의 서울의 건축 지형이 한 번에 들어오면서 서울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정작 지금 이 광장은 거대한 건물들 속에서 너무나 작기만 하다. 이제 고층의 거대한 신시청사가 완공되면 이곳은 시가 제공하는 즐거운 놀이공간이자 시청의 앞마당으로만 미미하게 그 명맥을 유지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곳에는 우리의 지난 100년의 광장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100년 전 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저물어 가던 제국의 황제의 눈물어린 노고가 깃들어 있고, 일제에 항거하던 식민 시대의 기억, 민주화의 거대한 함성, 세대가 함께 벌이던 축제가 아로새겨진 곳이 바로 서울광장이다. 이 광장이 단지 유흥과 평온한 문화의 장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진정한 광장의 본능을 지닌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램은 어쩌면 허황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이나 문화만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 발언과 민의를 수렴하는 장소, 밀실의 폐쇄성을 벗어나 진정 소통의 장으로서 기능할 때 광장은 스스로를 광장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나는 광장이다”라고 외칠 때, 광장은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먼 미래까지 동시에 조율할 수 있는 도심의 지휘자의 역할을 하며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뜻으로 존재하는 백성과 국민, 시민의 뜻을 담는 그릇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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