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0
디자인정글이 만난 핫이슈 메이커_
everyday eARThday!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교수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황무지에 40년 동안 나무를 심어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식물이 살 수 있을 거라곤 누구 하나 상상하지도 못했을 땅을 푸른 생명력으로 가득 채운 것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묵묵히 나무를 심은 한 사람의 노력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변화에 감탄했지만 그의 공(功)은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는 일엔 관심이 없던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무를 심어나갔다.
책 속의 주인공이 세상의 흐름에 맞춰 살며, 심은 나무가 죽어버렸을 때 좌절하고 나무 심기를 포기했더라면 푸른 숲은 존재하지 않았을거다. 한 사람의 꾸준한 행동이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이 이야기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곤 있지만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하는 에디터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교수가 추천하는 책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길지 않은 이 책의 필사를 과제로 내주기도 했는데, 이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필사해 그에게 보낸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참여자도 다양하다. 책의 내용은 노트뿐 아니라 쇼핑백,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도 쓰였는데, 빽빽하게 벽에 붙어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젊은 시절 주목받던 디자이너로 많은 것을 누리던 그가 본격적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1년이다. 환경을 위해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 그는 그린디자인을 실천했고, 2003년 국민대학교에 그린디자인 전공을 개설,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환경의식을 심어주었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어려워진 올해를 제외하곤 2002년부터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인사동에 나가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 나눠주었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디라도 달려가 눈을 맞추며 환경을 위한 메시지를 전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디자인, 전시, 강연,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윤호섭 명예교수를 만났다. 차는 물론 냉장고도 사용하지 않고 옷도 사지 않는 78세 할아버지에게선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멋과 풍요로움이 넘쳤다.
국내 최초로 그린디자인 전공을 개설, 그린디자인의 개념을 널리 알린 윤호섭 교수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이 연기되거나 취소됐어요. 작업실에서 그동안 작업하고 싶었던 것들 하면서 스케치도 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어디에선가 <나무를 심은 사람>의 필사를 과제로 내셨다고 들었어요. 전 필사는 하지 못하고, 읽고만 왔습니다.
그 책을 읽고 느낌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읽으라고 추천을 하죠. 사실 누구에게 어떤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특히 쓰라고 하는 건요. 내가 뭐라고요. 그런데 그걸 좀 감수하더라도 권하고 싶어요. 그 책은 정말 깨끗한 물 같은 거라서요.
요즘엔 내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책을 필사해서 보내오곤 하는데, 어떤 선생님은 본인이 담임을 맡게 된 학생들에게 항상 책의 내용을 쓰게 해요. 그럼 난 티셔츠를 한 장씩 다 그려서 보내주고, 그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곤 하죠. 매년 한 두 번씩이요.
작업실 한쪽 벽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나무를 심은 사람> 필사작이 전시돼 있다. 필사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나무를 심은 사람>을 손으로 쓰며, 인간과 동식물의 공존을 말하는 윤호섭 교수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 Design Jungle
그분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셨나요?
오래전 일인데,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내 강의를 듣고 나와 반 아이들을 만나게 하면 어떨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결과가 아주 좋았어요.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면 웬 할아버지가 왔나 할 텐데, 이 아이들은 환호성을 치고, 굉장해요. 강의가 끝나면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오고요. 내 홈페이지를 통해 질의응답도 하는데, 한 반의 아이들 모두에게서 질문이 와요. 그럼 난 답글을 달아주죠.
국내 최초 그린디자인 과목 신설
국민대학교에서 환경과 디자인 과목을 만드셨는데요.
멋지고, 새롭고, 편리하게 하는 것, 그런 게 디자인이긴 한데, 너무 그런 것만 한 거예요. 기업에 훌륭한 디자인을 제공해서 기업이 잘되고 나는 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제품을 어필해서 물건을 사게 하고, 이런 데에만 집중이 돼있었죠. ‘이러면 안 되겠다, 진정한 의식이 있는 디자이너를 가르쳐야겠다’ 싶었어요.
82년부터 전임을 했는데, 95년에 학장을 맡으면서부터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도록 학부 교양필수과목으로 만들었어요. 조형대학의 전 전공생들이 이 내용을 바탕에 두고 환경에 해롭지 않은 디자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린디자인에 대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90년대 초반에 환경에 대한 심각성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이 당시 일본 호세이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 학생이었던 미야시다 마사요시 씨였어요. 설악산 세계 잼버리대회장에 연대를 이끌온 그 사람은 호세이대학교 환경미술동아리 리더로, 환경에도, 미술에도 다 관심이 있었어요. 내가 그 행사의 포스터와 유인물을 디자인했었는데, 포스터를 디자인한 사람을 보니까 신이 나서 나에게 자꾸 환경과 디자인에 대해 물어보더군요. 이후 그 사람과 왕래를 하게 됐는데, 일본에 갈 일이 있을 때 그 사람 집에 가서 환경에 대한 자료도 보고, 그 사람이 환경 관련 전시회에도 데리고 가곤 했어요. 그러다 95년도에 보직을 맡았는데 ‘우리가 뭘 가르치고 있나’ 싶었죠.
그린디자인 전공도 신설하셨는데, 당시와 지금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지금은 약간 유명무실해진 것 같아요. 전공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지켜져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어떻게 심성을 키워주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래서 철학 수업이 있으면 좋겠고, 교과과정에 생태철학이 기본 교양으로 자리 잡았으면 해요.
제자분들 중엔 관련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대지를 위한 바느질, 공장, 에코준컴퍼니, 리펭구르 등 디자인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 액티비스트가 된 사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들을 하고 있죠. 시장의 현실이나 소비자 사이에서 모순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윤호섭 교수가 첫 작품으로 꼽은 포스터 <돌고래, 사람, 새>와 그 주변에 붙여져 있는 다양한 스케치들. <돌고래, 사람, 새>는 2000년 열린 첫 전시회 ‘everyday earthday!’ 포스터로, 윤 교수는 당시 공해를 유발하는 인쇄 공정을 피하고 주제 정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 백 장의 포스터를 직접 신문지 위에 그렸다.
작업실 곳곳에서 노란 종이가 눈에 띄었다. 작업실 앞 빵집에서 사용됐던 종이들이다. 여기에 윤 교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코로나 때문에 사용했던 마스크에도 그림을 그렸다. 마스크 사이에는 ‘Living with Corona Virus’라 쓰인 메모도 있다. 그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말했다. 바이러스 앞에 무력해진 인간, 활동의 제약으로 인해 깨끗해진 자연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Design Jungle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그린디자인
‘국내 제1호 그린디자이너’로 알려져 계신데, ‘그린디자이너’라는 수식어를 싫어하신다고 들었어요.
싫어한다기보단 ‘그린’이라는 말이 불필요한 거죠. 그냥 ‘디자인’하면 되는 건데, 잘 안되니까 과장을 슬쩍 한 거죠, 녹색으로요.
그린디자이너로서 활동하시기 전엔 어떠셨나요?
난 그전부터도 그린디자인 차원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재활용하는 게 몸에 익었었어요. 신문지 같은 데에 그림도 많이 그리고요. (앞에 놓인 노란색 종이들을 가리키며) 지금 이 종이들도 저 앞 빵집에서 트레이에 놓였던 종이들인데, 사용되고 나면 나에게 와요. 빵 크림도 묻고 하지만 아주 지저분하지 않으면 그림 그리기에 충분해요. 난 여기에 스케치해요. 이런건 아주 기본적인 덕목이죠. 우린 호모사피엔스,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이렇게 하면 절약이 되겠다, 자원 낭비가 안되고 에너지가 덜 들겠다 생각하는 건 너무나 기초적인 교양이잖아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직후 만든 엽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가 “그 때 핵 발전 밖에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나요?” 물어 온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요즘엔 환경문제에 대해 많이들 인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인식은 했는데 옆에 놔두고 있죠. 그게 내 DNA로 들어와서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데 약간 옆에 있어요. 글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론을 아는 것과 체득하는 건 좀 다른 것 같아요.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바이러스가 몸 안으로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진정한 바이러스라면 코로나처럼 몸에 들어와야 하는데 들어오질 않아요. 그래서 난 내가 쓴 글 한 줄, 내가 한 스케치 하나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가 됐으면 해요. 강연을 할 때도 청중 중 하나는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길 바라는 거예요. 그래도 한두 명이라도 감염이 되거든요. 그 힘으로 나는 견뎌요.
옷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
2000년도에 첫 개인전을 하셨는데, 티셔츠 작업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주제를 ‘옷, 우표, 낙엽’으로 했어요,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것 같아서요. 옷을 모두 거실에 가져다 쌓아봤어요. 그런데 티셔츠만 63장이 나온 거예요. 디자인 작업때문에 보관하던 것도 있었지만 모두 합치니까 그렇게 많았죠. 그걸 보고서 ‘난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다’ 했어요. 내가 누구에게 환경 운운할 자격도 없고, 이를 어떡하나 싶었죠. 그 문제에 대해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뭘 할까 하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평생 충분하니까 이제 옷을 사지 말자’고 마음먹었어요. 나의 후손들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고, 충무로 사진관에 옷들을 다 가져가서 하나씩 입고 사진을 찍어 남겼어요. 수백 장을 찍었는데 그중 하나를 골라 포스터로 만들었죠.
2000년도 첫 개인전 포스터. 환경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있던 수많은 티셔츠를 모두 입고 사진을 찍었고, 그 중 한 장을 골라 포스터로 만들었다.
단순히 티셔츠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물욕, 소유욕을 버리는 작업같이 느껴졌어요. 그런 것들을 내려놓는 일이 어렵진 않으셨나요?
사람마다 성격이나 행동이 다 다르잖아요. 나의 경우엔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 같아요. 한번 해보세요. 그냥 생각하는 거랑 실제 옷을 가져다 쌓아보면 달라요. 보통 예상했던 것의 세 배 이상 나오거든요. 나도 한 15장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충격이 큰 거예요. 있는지도 몰랐던 옷들이 장롱 속, 지하실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예요. 난 지금은 냉온방을 하지 않지만, 그동안 안 입는 옷에 냉온방을 해가면서 그렇게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설명할 수가 없는 거죠. 지구상에 헐벗고 굶주리는 난민들이 많은데 옷을 안 입어서 옷장 속에 쌓아 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그럼 첫 번째 개인전 이후 옷은 구매하지 않으세요?
그 이후에 옷이 생기긴 했는데, 옷이 멋있다거나 해서 구매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사지 않으면 옷 만드는 회사가 어려워지고 일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이게 이렇게 엉켜있는 문제예요. 그래서 예전엔 강하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은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해요.
환경을 덜 해치거나 소재를 업사이클링 하는 제품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
‘업사이클링’, ‘적정기술’ 등 새로운 용어들이 나올 때마다 조금 마음이 무거워요. 그것들로 자꾸만 또 뭘 하려고 해요. 그런 용어들이 궁극적으론 필요 없게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정신적으론 얼마든지 더 풍요롭게 해도 좋은데, 물질적인 건 우리가 정말 인내하고 연구해서 필요한 만큼만 최소화하면 좋겠어요.
그린디자인의 덕목 중에 ‘maximum minimize’, ‘maximum reduction’이라는 것이 있어요. 최대한 줄이자는 건데, 나의 경우엔 그 기준, 목표가 제로예요. 그런데 제로면 문명이 끝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해요. “윤 교수, 좋습니다. 그 대안이 뭡니까.” 그러면 난 “나에게 물어보지 마세요.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해요.
환경을 해치지 않는 움직임은 사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사실 실천이 어려워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패션 트렌드나 스타일에 민감한데요.
옷을 잘 꾸며 입은 사람과 수수하게 입은 사람이 있으면, 처음엔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 눈이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외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매력은 말이나 행동,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지, 물질적인 차원의 것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주의는 매력을 상품화하죠. 전 세계가 거기에 끌려가고 있어요. 거기에 맞설 수 있는 자존심이 있어야 해요. 그 자존심, 그 정신은 <월든>이나 <나무를 심은 사람> 같은 책에 다 나와 있어요.
'녹색여름전'에 삼 년 동안 출품됐던 앞치마 <친정어미니 추억속의 앞치마가 된 이불 홑청>. 윤정자 씨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불 홑청으로 만든 앞치마에 윤 교수가 그림을 그리고, ‘Keep a green tree in your heart and perhaps the singing bird will come’라 적었다. 사진 속 앞치마는 2년째에 전시됐던 것으로, 최종 완성작은 3년에 걸쳐 총 3회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 된 색감이 아름답다.
'녹색여름전' 출품작 <배냇저고리 릴레이>. 2010년 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 산 배냇저고리는 지금까지 10명의 아이들에게 입혀졌다.
녹색여름전 리플릿은 환경을 위해 모조지 70g에 식물성 잉크로 제작했으며, 인쇄 후 재단을 하지 않았다. ⓒ Design Jungle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녹색여름’전
교수님은 개인전 외에도 크고 작은 전시들을 무척 많이 해오셨어요.
최근엔 ‘공존’을 주제로 베트남과 보스턴에서 전시를 했고요, 매년 하는 전시로는 ‘녹색여름전’이 있어요. 남녀노소가 다 같이 참여하는데, <나무를 심은 사람> 필사작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이 출품되죠. 어느 할머니가 만드신 앞치마는 삼 년 동안 출품됐었어요.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불 홑청, 50년 된 천으로 만든 앞치마예요. 여기에 내가 천연페인트로 나뭇잎을 그려줬는데 해가 지나니까 지워져서 그 다음 해에 옆에 또 그려줬어요. 그 다음 해에 또 그려주고요. 녹색여름전엔 이런 것들이 전시되는 거예요.
윤호섭 교수는 2004년부터 버려지는 테이프로 테이프 공을 만들고 있다. 이 사진은 테이프 공으로 볼링과 같은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설치된 작품이다. 윤 교수는 작업실에서 여러 개의 테이프 공을 계속 키우고 있었다. 에디터도 테이프 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테이프 공도 전시품 중 하나였죠?
맞아요. 작업실에 한 가마니가 있는데, 큰 건 지금 전시장에 전시돼 있어요. 공들은 미국도 갔다 왔어요. 쓰레기가 미국에 갔다 온 거죠(웃음). 전시장에서 볼링처럼 공을 굴려서 흙이 들어간 페트병을 쓰러뜨리는 놀이도 했었어요. 공은 지금도 여러 개 키우고 있고요.
어떻게 만드시는 건가요?
박스에 붙어있던 테이프로 만드는 거예요. 분리배출을 할 땐 큰 택배 상자의 테이프뿐 아니라 그 안에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작은 상자의 테이프까지 모두 다 떼어내야 해요. (그는 코팅지로 만들어진 상자에 붙은 투명 테이프의 작은 조각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테이프를 다 제거했다고 생각했던 건데 다시 보니 이렇게 남아있네요. 이렇게 작은 투명 테이프는 잘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조각이라도 남아있다면 그 하나로 인해 재활용 탱크에서 종이가 풀리지 않아요.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일일이 다 떼어내는 거죠. 큰 박스에 붙은 테이프가 한 번에 뜯기는 건 아주 해피한 거예요(웃음).
어떤 사람들은 쩨쩨하게 왜 그러느냐고 해요. 그런데 이게 시작이거든요. 이렇게 작은 조각이라도 떼어내서 공에 붙여요. 친환경 제품 잘 만들기로 유명한 회사의 포장상자인데, 종이도 너무 고급이고, 이런 부분에서도 환경을 위해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좋을 텐데, 좀 아쉽죠.
윤호섭 교수가 그림을 그린 <제돌이의 꿈>이다. 2013년 먹이를 쫓다 그물에 걸려 동물원에서 돌고래쇼를 하게 된 제돌이는 3년만에 고향인 제주 앞바다로 돌아갔다. 10년 넘게 돌고래를 그려온 윤 교수는 제돌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제돌이를 응원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려 제돌이에게 보여주었고, 제돌이는 그림에 입맞춤을 했다. 해당 영상은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윤호섭 교수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와 가방. 모든 그림은 천연물감으로 그려진다.
매년 봄부터 초가을, 인사동에서 열리는 티셔츠 퍼포먼스
인사동 티셔츠 퍼포먼스는 언제부터 해오셨나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있지만, 2002년부터 매년 해왔어요. 3월 말부터 9월 말까지 하는데, 전엔 매주 나가다가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이젠 한 달에 한 번씩 나가요. 상점 분들이 좀 싫어하시거든요. 사람들이 다 가게를 등지고 그림 그리는 것만 보니까요.
힘들진 않으세요?
힘든 게 아니고 그날이 기다려져요. 재미있고 좋으니까요. 비가 와도 나가요. 한 번은 비가 와서 나가지 않았는데 전화가 와서 “교수님, 어디 계세요”하는 거예요. 지방에서 아이들이 기차 타고 오곤 하거든요. 그다음부턴 비가 와도 나가서 처마 밑에서 그림을 그려줘요.
티셔츠는 무료로 나눠주시나요?
무료로 나눠주죠. 판매를 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외국인들이 특히 그러는데, 그냥 준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해요. 이건 캠페인이라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는데도 꼭 대가를 놓고 가려고 해요. 심지어는 그림을 받고선 돈을 놓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땐 불러서 ‘꼭 주고 싶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당신 나라 NGO에 가서 기부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약간 기분 나빠하기도 해요.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기부를 해야 하는 건데, 그림을 받고 그런 이야길 듣게 되니까요.
그럼 티셔츠는 어떻게 구하시나요?
새 티셔츠가 생기기도 하고, 아름다운 가게에 시민들이 기증하는 티셔츠를 스태프들이 세탁 후 다려서 나에게 가져다주기도 해요. 거기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요즘엔 사람들이 가져오기도 해요. 손수건에도 많이 그려주고요.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기꺼이 어디든지
많은 곳에서 강연을 하고 계신데, 그 대상과 장소도 다양해요. 요청이 들어오면 대부분 강연을 해주시나요?
그렇죠. 아주 구태의연한 차원에서 계획된 그런 모임은 제외하고요. 어떤 곳이든 내가 가서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면 체면 이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보통 사람 같으면 가지 않을만한 곳도 난 가요. 먼 곳도 가고, 몇 명 되지 않아도 가고, 서울도 가고, 제주도 가고요. 갈 땐 기본으로 가방 두, 세 개에 엄청 많이 싸 들고 가요. 나눠주려고요. 어디서든 날 찾으면 오히려 더 고맙게 생각하죠.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내가 그렇게 저명한 사람도 아닌데.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환경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도 그렇지만, 겸손하신 모습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에요. 대단한 발견도 아니고,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그냥 좀 절실하게 ‘이게 뭔가’ 하는 거죠. 우리는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잖아요. 호모사피엔스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요. 우린 생각할 수 있잖아요.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는 기억력이 아니고, 성찰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철학적인 교육이 필요한 것이고요. 그래야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 이득이 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않나 생각해요.
난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영향을 꽤 받았죠. 나도 멋진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디자인 프로젝트를 해서 돈도 벌면 좋겠지만 그보다 진정한 가치의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책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건, 수 천 년 전의 사람들이 해 낸 기막힌 생각이 문장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과 나의 영혼이 통하잖아요. 오랜 시간을 넘어서서 나에게 와닿아요. 장 지오노 같은 분은 굉장히 고맙게 생각해요.
기업, 기업의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자세
기업의 디자이너들은 환경적인 의식을 디자인에 담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기업의 경우 환경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기업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유럽만해도 EU 규정에 어떤 물질로 만들었는지, 에너지를 얼마나 소비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두고 맞지 않으면 수입을 하지 않아요. 무역에선 필수사항이죠. 이젠 해야만 하는, 정말 필요한 덕목이 됐어요. 국내의 대기업도 제품을 수출할 때 하청업체 공장의 공기질까지 체크가 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기업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거죠. 기업에서도 그렇게 디자인을 해야 앞으로 더 매력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디자이너들도 충분히 환경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디자인할 수 있어요.
이제는 환경문제에 대해 모두가 몸으로 깊이 느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만은 없지만, 지금 그 부분에 대해 의식과 철학이 없다면 균형 잡힌 인격체라 할 수 없어요. ‘생태맹(生態盲)’이라고 하죠. 지식은 있고 환경의식이 없는 사람, 생태의식이 없는 사람이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면서 생태맹이 되어선 안되죠.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헌혈 광고. ‘Have you ever given a gift so wonderful, someone carries it with them the rest of their life?’라는 문구만 적혀 있지만 무척 감동적이다.
그는 ‘공존’을 주제로 균형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해왔다. 포스터 <동, 식물 사람 얼굴>은 장일순 선생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이다.
그의 바람은 ‘공생’
얼마 전 SNS에 무척 의미 있는 문구를 공유하셨죠?
간접적으로라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 SNS에 그림과 글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최근엔 사람들에게 영문 번역을 요청했어요. 명함 크기의 흑백 문장으로만 된 광고인데, 2000년대 초반 미국에 갔을 때 <뉴욕타임스> 매거진을 보게 됐는데, 거기 나왔던 광고예요. ‘누군가 평생 그것을 지니고 다닐 멋진 선물을 준 적이 있는가’라는 이 문구를 보고 서울로 돌아와 헌혈을 했어요. 나를 헌혈로 유도한 문구죠. 뭘 잘 액자에 넣지 않는데, 이건 액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어요. 참 멋진 말 아닌가요? 지금 세계 각국의 병원이 혈액 부족 사태를 겪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진을 올렸죠. 번역은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번역을 부탁드린다’고 하면서 이걸 읽어보시라고요. ‘누가 누구에게 번역을 시키나’ 할 수도 있겠지만, 유머러스하게 이런 내용을 전하고 싶었어요.
답을 달아 주시는 분들한텐 모두 상품도 보내드려요. (작업실에 쌓인 택배 상자들을 가리키며) 이 안에 매우 풍요로운 선물이 들어있어요. 바이러스 심느라고요(웃음). 댓글 주신 분들 중엔 중학교 땐가 내 강의를 들었고,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도 있어요. 독일이건 미국이건 소포를 보내줘요. 받는 사람에게 감동일 수 있잖아요. 요즘 다들 마음이 무거우니까, 제 나름의 퍼포먼스를 준비한 거예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어요.
윤호섭 교수의 작업실을 자주 찾는 ‘그래구리’. 그와 그래구리가 나누는 대화는 그의 SNS에서 만날수 있다. (출처: www.instagram.com/hoseob__yoon)
인터뷰 도중 그의 작업실엔 직박구리가 날아왔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작업실을 찾는 새에게 ‘그래구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새와 공간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하는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래구리를 맞이하며 ‘가슴속에 푸른 나무를 가꾸고 있으면 새가 울며 날아올지 모른다’는 중국 속담을 읊었다. 피를 나누는 것, 새와 친구가 되는 것 모두가 공생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아닐까.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모든 행동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의 말이 맴돈다. “삶의 터전을 물려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자존심이 없는 것 아닌가. 자존심이라는 것은 자신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자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 약자에 대한 보살핌이다.”
‘그저 도리를 지키는 것뿐’이라며 자신을 낮추고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는 윤호섭 교수를 보며 ‘나무를 심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날’을 며칠 앞둔 그날, 작업실에서 본 그의 문구 ‘everyday earthday!’는 ‘매일이 지구의 날’이라는 참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주었고,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삶의 방향을 정비하게 해 주었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윤호섭(www.greencanv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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