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6
황부용 작가는 33년간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굵직한 업적을 쌓아왔다.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명지전문대학에서 7년간 교수로 재직한 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으로 근무하며 서울올림픽을 치뤘다. 이후 디자인전문회사 ‘디자인브리지’를 설립, 5년간 운영했던 그는 중앙일보 신문디자인 전문위원과 조선일보 신문디자인 자문역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황부용 작가
그가 만든 결과물은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됐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명지전문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그는 국내 최초로 편집디자인 과목을 개설했고, 알만한 출판사와 잡지사에는 명지전문대 도안과 출신들이 없지 않을 정도였다.
1978년 발간한 활자체 디자인 연구서 <황미디엄>은 1300자의 독창적인 한글 디자인과 한글 활자 디자인 개발에 대한 사상과 방법 등을 상세히 수록, 한국 시각 디자인계에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한글 디자인 전문가들의 본격적인 탄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1988 서울올림픽 스포츠픽토그램
1988 서울올림픽 안내 픽토그램
1979년 출판한 12권의 시각문화문고는 시각디자인계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여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업계 종사자들에게 관련 지식 습득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1981년에는 국내 최초로 편집디자인 관련 논문으로 석사학위 논문 ‘정기간행물의 편집디자인 매뉴얼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정부와 디자인계를 연결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스포츠 픽토그램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세계 픽토그램 디자인의 역사에 남을만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공식포스터 - 마라톤
평화포스터. 1987년 UNESCO-IAA 주최 국제포스터살롱 2등상 수상. 프랑스 파리.
1987년 발표했던 그의 평화포스터는 국제포스터살롱에서 단독으로 2등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포스터 디자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95년 국내 최초의 신문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된 그는 한국 그래픽디자인계에서도 생소한 영역이었던 신문디자인 분야에서 한글 가로짜기 신문편집 시스템으로 개혁, 해당 신문의 발행부수 증가와 광고매출 증대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의 디자인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그는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3년간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작품은 무려 700여 점. 그는 이제 작가로 할동하며 2018년부터 해외 아트페어 및 해외 개인전 등을 통해 파리, 베니스, 밀라노, 이스탄불, 앙카라 등의 국제무대에 유화, 수채화 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서 소화하는 그는 작업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유튜브 활동을 한다.
올해 72세의 나이로 그 어느때보다 왕성한 작업을 하고 있는 황부용 작가는 오는 2월 3일부터 15일까지 갤러리내일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등 총 24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황부용 작가를 만나 작가로서의 철학과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황부용 작가와의 인터뷰
그래픽 디자이너로 33년간 활동하셨습니다. 어떻게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나요?
제가 33년만에 과감하게 종지부를 찍은 계기 중 하나는 1995년 베이징에서 CI 국제세미나가 열렸을 때 영국 펜타그램 설립자 콜린 폽스의 발표를 들은 것이었어요. 콜린 폽스는 당시에 ‘그래픽디자이너의 정년은 55세’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이후 은퇴해서 승마로 소일을 하겠다고 했어요.
운영하던 디자인 전문회사의 사업 실패와 대학으로의 복귀 실패는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운명의 장난이었습니다. 되돌아보니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서 우승하는 것도 아니었고, 힘이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었고,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었으며, 아는 것이 많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었어요.
누구든 때가 돼 불행이 덮쳐 오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해요. 모두들 그물에 든 물고기와 같고 덫에 치인 새와 같은 신세라 갑자기 액운이 닥치면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죠. 우리들은 모두 예기치 못한 인생의 덫에 걸릴 수 있어요. 그러나 설사 어떤 덫에 걸리더라도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인물다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부활 21-20, 2021, 캔버스 위에 유채, 90.9x72.7cm
부활 21-44, 2021, 캔버스 위에 유채, 90.9x72.7cm
'부활의 화가'라 불리우십니다. ‘부활’을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2017년에 제가 존경하는 변호사 선배가 심장 수술을 받았어요. 그 과정에서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한 점을 그려 선물을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벽에 그려 놓은 나뭇잎 하나가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바로 ‘힐링 그래피즘’입니다. 그림으로 생명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가 많지만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힐링 그래피즘'의 창안자이신데요, '힐링 그래피즘'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면...
‘그래피즘’이란 한마디로 구상적인 상징 형태로 인간의 원초적인 사상을 표현한 거예요. 그래피즘의 역사는 기원전 약 3만년부터라고 해요.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추상 조형이었습니다. 실물의 묘사가 아닌 상징적인 변환이며, 문서의 한 형태로 부적 같은 것입니다. 심벌 마크도 그래피즘에서 온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힐링 그래피즘'이란 그래피즘에 '치유'의 의미를 담아 만든 말이에요.
부활 21-66, 2021, 캔버스 위에 유채, 90.9x72.7cm
본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성장 배경을 가진 화가입니다. 현재까지 ‘부활’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6번 열었어요. 이번 2월 전시가 일곱번째 전시죠. 저의 작품들은 초현실적인 자극을 통해 잠재의식을 파고듭니다.
각각의 실루엣들은 새와 나뭇잎 같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특징으로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보고 더 새로운 것을 찾아보라고 요구하면서 미묘한 감각적 충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저의 작품들은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무의식적이고 지각적인 자극을 줌으로써 인간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황부용 작가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루엣’입니다. 빛으로 인해 우리는 밝음과 어두움이 있고 실체와 그림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실루엣은 아름다움을 최소한의 외곽선으로만 드러냅니다. 지구상에서 실루엣으로 처음 연극을 시작한 사람들은 중국인들이에요. 중국의 그림자 연극은 장막을 치고 인형에 조명을 비춥니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죠. 그림자 연극은 섬세하고 정교한 조형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어요. 저는 주로 사진 속에서 아름다운 실루엣을 찾습니다.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도 있고 인터넷 서핑에서 발견한 사진들도 있습니다.
부활 22-39, 2022, 캔버스 위에 아크릴화, 80.3x100cm
부활 22-44, 2022, 캔버스 위에 유채, 116.8x91.0cm
작업 과정을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기법이라도…
먼저 수채화로 10여 점을 완성하고, 그 중 1~2점을 유화로 확대하는 식이에요. 힐링 그래피즘의 창안자로서 제가 보여주는 실루엣 기법은 매우 유니크 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상징적이지만 그것들은 심벌이나 트레이드마크처럼 단순 명쾌하죠. 배경으로 사용하는 액션 페인팅 기법으로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자리와 같은 시각 효과를 연상시키고자 합니다.
황부용 작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전업화가로 회화 작품활동만 시작한지 만 14년인데요, 우리는 보통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합니다. 많은 노인들이 일에서 손을 떼는 그 순간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벽화를 그릴 당시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베르디가 오페라 <오셀로>를 작곡했을 때는 80세였으며, 괴테가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82세였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60대 이후에 대표작을 내놓았어요.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66세에 작곡했고, 소포클레스는 75세에 <오이디푸스 왕>을 썼으며, 앵그르는 그의 대표작 <터키탕>을 82세의 나이에 그렸습니다.
2010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한 ‘통영의 피카소’라고 불렸던 전혁림 화백의 만년 인생 열정도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93세가 됐던 해 12월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해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직후 청와대로 들어가 집무실 데스크 뒤에 걸어놓겠다고 찾았던 <통영항>이 바로 전혁림 화백의 작품이었습니다. 남은 인생도 저는 쉬지 않고 무언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부지런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가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군요. 특별한 관람 포인트가 있나요?
지난해 3월의 개인전 이후로 지난 1년간은 기독교의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종려나무 줄기가 여성의 누드로 변화하는 메타모포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저의 메타모포스를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이 깃들어 있는 조형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메타모포스’란 하나의 조형 요소가 다른 조형 요소로 인해 트랜스포메이션되는 것을 말합니다.
황부용 작가와의 인터뷰
오랫동안 디자인계를 떠나있다가 이젠 그래픽디자이너를 겸한 전업 화가로서 대중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올해 또 어떤 계획을 구상 중이신가요?
당분간은 메타모포스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더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부터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요, 현재까지 모두 56편의 동영상을 올려놓았어요.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총 6시간 정도의 분량입니다.
2009년 전업화가 선언 이후 13년간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적용해 디자인계와 의식적으로 담을 쌓고 살아왔어요. 전혀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았죠. 제가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데 10년 정도면 족할 줄 알았는데 13년이나 걸렸습니다. 유튜브 방송을 시작으로 디자인계로 다시 복귀했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그래픽디자이너 겸 전업화가입니다. 디자인 일을 의뢰받는 식으로 주로 활동하지는 않겠지만, 유튜브 방송을 통해 많은 이야기들을 후배 그래픽디자이너들에게 남기고자 해요.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인물사진 촬영_ 정준 객원영상기자
인터뷰 장소_ ddp 디자인매거진 라이브러리
작품사진 제공_ 황부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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