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5
한국 폰트계의 큰 별로 일컬어지던 산돌 석금호 의장이 지난 23일 향년 69세로 별세했다.
한글 서체 개발에 매진하며 한글 폰트 대중화에 기여해온 석금호 의장은 한국 폰트계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1984년 국내 최초로 폰트 회사인 산돌타이포그라픽스(산돌의 전신)를 설립, 한글 서체 개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산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 기본 서체인 ‘맑은 고딕’을 개발했으며, 현대카드, 삼성전자, 네이버, 배달의민족 등 다양한 기업의 전용 서체를 제작하기도 했다. 산돌이 개발한 나눔고딕과 나눔명조 등은 네이버 무료 폰트로 대중들의 한글 폰트 사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산돌은 2022년 10월 코스닥에 상장하기도 했다.
석금호 의장의 별세 소식에 수많은 디자인 관계자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아래는 203 인포그래픽연구소 장성환 대표의 글이다.
[상실] 한글 폰트계의 큰 별이 지다
산돌의 석금호 대표 별세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 마침 연락이 된 명계수 선배님(전 건국대 교수)과 시간을 맞춰 빈소 방문
석금호 대표와 인연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었던 곳에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 디자인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석 대표는 고 김진평 선생님과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디자인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인연으로 함께 일했던 편집팀 동료들과 석대표를 만나 예전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창간호와 휴간호(실제는 한국판 폐간)
어쩌면 석대표의 폰트 외길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당시 잡지, 출판계의 제작방식은 금속활자에서 사진식자로 넘어오던 시기였다. 한국 현대의 대표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내지도 살펴보면 활판인쇄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창간호 역시 활판인쇄였다. 재직당시 우연히 발견해 간직하고 있는 준비호는 심지어 세로쓰기다. 그러나 1978년 8월호 창간호는 가로쓰기다. 그런 고민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후 몇 해 뒤 석대표는 81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는 헬베티카 콘데스드 블랙_Helvetica Condensed Black 서체를 제목에 자주썼다. 그러나 그 서체에 준하는 한글 서체가 마땅하지 않았다. 고작 특견고딕 정도가 최대 굵기였다. 살짝 겹쳐 두 번 찍는 꼼수의 투타 방식을 써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석금호 대표가 수작업 레터링을 했다. 트레팔지 위에 높이 3cm로 필요한 글자를 한자씩 레터링해 가며 제목으로 활용했다. 그때 레터링한 글자의 이름을 “돌체”라고 불렀다. 본인의 이름 중 성인 “석”자 그리고 본인의 종교 속 반석, 활석 의미를 담은 명칭이었다. 두껍고 단단한 글씨모양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레터링된 종이조각들이 가나다 순서로 슬라이드 스크랩북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석대표는 퇴사 후에도 1자당 3천원을 받고 작업했다 들었다. 내가 갓 입사했을 때 까지도 그 스크랩을 활용해서 디자인했었다.
석 대표가 레터링한 돌체가 사용된 당시 리더스 다이제스트 표지
그러다가 1991년 매킨토시 컴퓨터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전격 도입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두산동아 소속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89년 졸업작품 준비를 매킨토시로 작업해 본 경험이 있던 나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잡지 디자인에 적극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매킨토시 도입 추진팀 CAPS에 종이로 보관돼 있는 돌체를 폰트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캡스팀의 답변은 본문 서체개발이 급해서 우선 순서가 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심정으로 손들고 나서서 그 작업을 맡아서 진행했다. 신입사원의 당돌함에 당시 상사가 놀랐던 기억도 난다.
1991년 폰트그라퍼로 돌체 작업하던 모니터 사진. CRT 모니터 시절이라 불룩하다.
석금호 대표가 손으로 작업한 300여 자의 레터링을 가나다 순서 그리고 자모 조합형태로 분류했다. 그리고 당시 300dpi 테이블 스캐너로 일일이 스캔해서 정리했다. 그것을 토대로 없는 글자를 유추해서 만들었다. 석금호 대표의 레터링이 일시에 작업된 것이 아니고 필요한 글자 우선으로 제작되었기에 비슷한 글자끼리도 조형, 자소가 다른 부분도 있어 고민이 많았다. 정말 석금호 대표의 고민과 해결책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레터링 수업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두산동아 본사의 서체개발팀에 최정호 선생 문하였던 어른이 계서서 조언을 많이 받았다. 그분은 세필로 명조체를 순식간에 그려내던 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두산동아 내부용 ‘돌체’ 2,350자가 완성되었다. 언급된 돌체는 후일 산돌에서 제작된 ”헤드라인체“의 원형. 석 대표의 핸드 레터링 작업 결과물을 일컺는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군 제대 후부터 복학생시절 안그라픽스를 드나들며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안상수 선생님의 “안체” 작업. 서체용 프로그램이 따로 없어서 IBM 호환형 AT 컴퓨터에서 오토캐드로 디자인된 서체에 감탄을 했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장만해서 따라 만들어 보며 안체의 구조와 3벌식 서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돌체를 디지털 폰트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완성형 서체의 구조와 설계를 직접 경험해 본 것은 큰 경험이었다. 두 분의 족적은 그 자체로 내게 있어 큰 배움이었다. 그런 분이 이제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1991년 용평 디자인 세미나 때. 숙소의 어느 방에서 김진평 선생님, 석금호 선배님, 한재준 선배님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그 자리에 막내로 참석해서 그분들이 나눴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막내인 내게 이런저런 격려를 많이 해 주셨었다.
석금호 대표는 그 후로도 많은 서체의 개발과 제작. 관련 활동으로 한국 디자인 계를 풍성하게 해주셨다.
그런 분이 이리 황급히 떠나시다니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석대표의 서체들은 우리 디자인계에 영원히 살아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한국 디자인계에 큰 어른들을 비롯해서 석대표 같은 분들에 대한 기록이 더 지속되기를 바라며 아쉬운 마음에 급히 적어보았다. 이글을 게재하게 해준 “디자인 정글”에 감사를 드린다.
2024.05.24
빈소에서 돌아오는 지하철 2호선에서 장성환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글 및 사진제공_ 203 인포그래픽 장성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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