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 2017-06-26
가상현실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 이하 VR)’ 기술은 지금 전 세계 IT업계와 소비자 모바일 디바이스 업계를 사로잡고 있다. 테크 업계에서 ‘미래의 안경=VR 안경’이라고 여겨진다. VR 기술은 인간의 시각 세계를 재편성하고, 인간의 인지력과 활동을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을 통해서 조작·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지닌 첨단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 시대 우리의 얼굴에 씌워질 안경은 단순히 인간의 시력을 교정해 더 잘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넘어서, 완벽할 수 없는 ‘현실을 수정하고 새롭게 하는’ 콘셉트의 일상용품으로 탄생시킨다는 것이 테크계의 목표다.
이타이 노이(Itay Noy)가 디자인한 ‘걸리버’ 안경은 본래 가상현실을 위한 3차원(3D) 안경을 만들기 위해 착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유희적인 결과물이다. 사용자는 VR 안경을 쓰고 가상 속의 현실을 3차원 공간으로 인식하면서 어떤 경험을 거칠까? 가상현실을 들여다보는 사용자는 전혀 다른 크기의 세상 속 색다른 공간에 빠진 듯한 시각적 환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사용자의 얼굴은 곧 이러한 활동이 ‘가상적’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장소가 된다. 디자이너는 콧대와 경첩 대신 안경다리에 매달려 붙들고 렌즈를 잡아 고정시키는 작은 인체 모형으로 대체해 넣고 첨단 VR 안경이 선사하는 환상적 경험을 표현했다.
안경 뒤에 숨은 나, 안경과 함께 드러내다
안경이란 무엇인가? 안경은 광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시력을 강화시켜준 의학적 보정물이자 험악한 자연으로부터 눈 보호와 호신용 물품으로서, 액세서리와 패션 디자인 아이템으로서, 그리고 개성과 신념의 선언이자 심벌로서 사회문화적인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런가 하면 안경은 디자인에 따라 인간의 얼굴을 획기적으로 달라 보이게 할 수 있고, 나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위장할 수도 있게 해주는 위력 때문에 본질적으로 변화와 변신적 특성을 지닌 오묘한 인공물이자 발명품이기도 하다.
안경의 가장 원초적 기능은 약시를 교정해주어 더 잘 볼 수 있게 돕는 의학적 기능이다. 2인조 디자인팀 레디시(Reddish)가 디자인한 안경은 세련되고 섬세한 패션 액세서리보다는 순수하게 실용적이고 산업기술의 산물로 접근했다. 금속 귀걸이 겸 안경테, 굴곡 없는 일체형 플라스틱 렌즈,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금속 나사와 핀은 마치 목공소나 공장 생산라인에서 눈 보호용으로 사용하는 보안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패션을 일부러 무시하려는 듯한 제스처는 오히려 더 패셔너블하게 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힐라 샤미아 스튜디오(Hilla Shamia Studio)는 시력 교정용 안경에 쓰이는 렌즈용 유리 소재를 발랄한 패션 액세서리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디자이너 야콥 카우프만(Yaacov Kaufman)에게 안경이란 일종의 가면이다. 과거 바로크 시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시민들은 때때로 자기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써서 눈 또는 얼굴 전체를 가리고 외출했다. 반면에 오늘날 현대인은 맨 얼굴과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을 외부 세상에 보여주고 스타일 변신을 과시하는 패션 선언의 수단으로 안경을 쓴다. 그에 착안하여 야콥 카우프만의 ‘팰럿 마스크(Pallet Masks)’ 시리즈는 가면으로서의 안경 콘셉트를 유희적으로 탐색했다. 아리엘 라비안(Ariel Lavian)의 ‘플리시스(Flysses)’은 안경 렌즈와 여성 속옷 아이템 사이의 유사성을 포착하여 형상의 하이브리드화를 시도한 경우다. 곤충의 몸체와 합성 복안 구조를 연상시키는 가면이자 장신구 콘셉트를 안경 디자인에 응용했다.
안경, 인간의 얼굴과 상호작용 하는 미적 보철물
피니 라이보비치(Pini Leibovich)가 일찍이 1988년에 뉴욕 MTV 방송사와의 협력으로 디자인한 선글라스는 당시 가장 획기적인 형태의 안경테 중 하나였다. 기하학적인 모양보다는 사람의 얼굴 모양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안경테를 창조한다는 목표로 디자인됐다. 두껍고 투박해 보이는 안경테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 구멍 주변이 튀어나와 있는 인간의 머리뼈와 안구골 구조를 본떴다. 훗날 2013년 봄에 소니가 VR 개발자용으로 발표한 SED-E1 스마트 증강현실 안경 디자인을 미리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에즈리 타라치(Ezri Tarazi)가 디자인한 ‘카본우드 안경’은 여러 겹의 나무껍질을 탄소 섬유와 융합시켜 만든 탄탄하면서도 탄력 있는 소재를 활용했다. 이 안경은 최근 안경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안경테와 안경다리 사이에 접철이 없는(hingeless) 일체형이다. 이음새나 접는 부분이 없는 카본우드 소재의 특성 때문에 얼굴에 쓰면 선글라스로, 머리 위로 올리면 헤어 밴드 액세서리로 활용할 수 있다.
역사가 제안하는 미래 안경의 시나리오
속속 개발되고 있는 VR 기술에 발맞추어 첨단 안경에 대한 콘셉트를 전환하고 디자인해야 하는 현대 디자이너는 어디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스라엘 홀론 디자인 박물관의 ‘오버뷰(Overview)’ 전시회는 안경의 문화사를 복습하고 관찰하며, 과거 인류 사회에서 안경의 기능성, 사회적 인식, 제작방식 등을 이해하면 미래의 안경 디자인이 나아갈 수 있는 몇몇 시나리오를 창조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과거 시대 모노클(monocle) 단안경은 한 손으로 잡고 보는 돋보기로서, 부자를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팽스네(pince-nez) 안경을 코에 걸거나 안경을 쓴 사람은 글을 깨친 식자, 더 나아가 과학, 진보, 혁신을 의미했다. 제3의 눈이란 시각적 감각을 잃어도 길을 찾을 줄 알고, 따라서 제3의 눈을 소유한 자는 설혹 두 눈의 시력이 떨어져도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했다. 개성의 표현과 패션 선언의 도구였던 20세기 개인주의 시대를 지나,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의 얼굴을 장식하게 될 미래의 안경은 무엇을 의미하는 도구가 될 것인가? 그에 대한 시나리오는 VR과 AR 기술을 주제로 한 다음 칼럼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