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20
인터넷은 광활한 정보의 바다이다.
관련 키워드를 입력하면 관련 사이트부터
이미지, 동영상에 논문까지 모든 정보 쉽고 빠르게 전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던 시절 나름대로 PC통신을 통하여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정보의 풍요로움을 느꼈다.
다이얼업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하여
인터넷으로 다시 트렌스퍼하던 그 때는
ADSL이나 광Cable이 없던 시절이므로 html로 구성된 비주얼은 오히려 많은 불편함을 동반하였다.
느린 화면 전환을 기다려야만 하는 답답함과
그 시간 동안에도 부담해야 하는 전화비는 큰 부담이었다.
반면 Text를 기본으로 하는 FTP(파일서버서비스)와 문자 위주의 구성이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자료와 상대적으로 빠른 서칭이 가능하였던 PC통신은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이 없던 그시절
우린 원하던 원치 않던 TV, 신문, 잡지, 편지 등을 통하여 일방적인 정보를 제공 받았다.
취재 │ 김영복 기자
PC통신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네트워크 서비스를 지칭한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MODEM)을 통한 전화회선(PSTN)이 사용되지만, ISDN 등과 같이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PC통신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회사내에서 네트워크를 이용한 동호회 활동이나 게시판 시스템이 선보이기는 했으나 전국적인 망을 가진 사업자가 운영하는 통신시스템의 등장은 사회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PC통신서비스가 등장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제공한 ‘KETEL’서비스와 데이콤에서 제공한 ‘천리안’서비스가 시초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서, 언론기사 전송을 위하여 대도시에 마련해 놓은 언론기사 전송용 서버를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한경 KETEL이다. 1986년 11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 경제 프레스텔(Prestel)을 개통하였고, 1987년 4월 한경 KETEL로 변경하였다. 1987년 5월에는 한경KETEL 영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1989년 11월 KETEL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주)를 설립을 하였다.
이듬해 3월 서비스를 코텔(KORTEL)로 변경하고 7월에 하이텔(HiTEL)로 변경하였다.
한편 천리안의 경우 1984년 5월 (주)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7년 4월 한글전자사서함, 1988년 5월 문자정보서비스 천리안II로 이어져, 1990년 1월에는 PC-Serve가 개통되었다. 1992년 12월엔 천리안II와 PC-Serve가 통합하여 새로운 천리안 서비스가 시작 되었다. 1994년에는 나우누리, 1996년에는 유니텔 등 PC통신 업체들이 속속 생기면서 일반인 상대의 직접적인 서비스로 2000년 전후로 350만명 이상의 이용자가 이용하며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서비스의 연결을 위한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인 새롬데이타맨, 이야기와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발달은 보다 편리하게 PC통신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PC통신의 서비스로는 다른 사람과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전자우편(E-mail) 서비스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채팅 서비스, 자신의 의견이나 광고(구인, 구직, 제품 판매 등) 등 통신상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정보를 조회 하는 기능인 전자게시판(BBS : Bulletin Board System) 서비스가 있었다.
또한 홈뱅킹과 홈쇼핑 등의 거래 서비스도 제공이 되었으며, 다른 사용자와 실시간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서비스 등의 다양한 컨텐츠가 제공 되었다.
그러나 1998년 전후로 인터넷이 활발히 사용된다. 초반 느린 속도 때문에 인터넷을 외면하였던 유저들은 전용선을 통하여 속도를 향상 시킨 인터넷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데이터를 음성 신호로 변경하여 전화 신호 속도에 맞추던 모뎀과 속도에서 비교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월 사용료 지급, 전화 요금, text위주의 한정적인 자료, 간단하지 않은 사용 방법 등 상대적으로 인터넷에 비하여 유저에게 사용의 불편, 경제적인 부담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지금의 인터넷과 같이 크고 작은 모든 서버가 직접 연결된 그물망 방식이 아닌 대형 통신사 중심으로의 서로 배타적 운영은 유저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제공 할 수 없었다. 2000년까지 PC통신 업체의 사용자 수는 증가하는 추세지만, 98년 이후로 유료 사용자수는 감소하면서 실질적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난해세계 최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인 아메리카온라인(AOL)이 유료 가입자 의존에서 벗어나 온라인 광고 확대를 통한 성장 정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현상은 최대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AOL도 시대의 흐름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지난 2002년 2천 7백만명에 이르던 유료 회원 수는 최근 1천 5백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무료화를 선언하며 온라인 광고 사업으로 수익 창출의 대상을 전환한 것이다.
국내의 경우 지난 달 말 ‘KORTEL’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하였던 하이텔이 16년 동안의 서비스를 중단하였다. 하이텔은 서비스를 중단하기 직전인 2007년 초 월 평균 접속자수 200명 이하, 일 평균 접속자수 5명 내외로 2000년 200만 가입자들이 활동하던 당시와 비교하면 급격한 이용자수 감소를 보였다. 이는 곧바로 경영적 적자와 새로운 컨텐츠 개발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명목상 몇 업체들은 PC통신서비스를 계속적으로 하고는 있으나 이용자수의 증가를 기대하거나 수익창출의 목적이 아닌 기존의 사용 고객에 대한 에프터 서비스 차원이라고 말 한다. 기존의 업체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PC통신 사업부분에서 대부분 철수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컨텐츠와 기술 등을 웹상으로 이동하여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우선 2004년부터 신규 가입자를 받지 않았던 하이텔은 2004년 7월 한미르와 함께 파란이라는 포털서비스를 web상에 서비스를 하면서 PC통신의 web화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PC통신내의 자료 대부분을 web으로 옮기면서 기존 유저들의 web이동을 도왔다. ‘하이텔’ 브랜드를 이용한 새로운 PC통신 서비스와 대체 서비스 계획은 당분간 없을 예정이며, 포털서비스 위주로 성장한다고 밝혔다.
국내 최대 이용객, 유료회원을 가지고 있는 천리안 같은 경우는 현재 월평균 접속자 1500명, 유료 사용자 7만명이나, 2000년 유료가입자가 350만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역시 급격한 이용자 감소를 보인다.
현재 천리안은 PC통신서비스 중단에 대한 계획은 없으며, 이용자가 원하는 한 서비스를 유지할 계획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서비스도 계속 웹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에 월 접속자 수는 계속 줄어들 것으로 담당자 역시도 예상하고 있다. 또한 PC통신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개발 계획은 없을 것이며, 천리안과 심마니의 통합포탈 CHOL.COM에 대한 포털 서비스에 주력 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1998년경 웹서비스를 시작한 나우누리와 유니텔의 경우 커뮤니티 포탈 서비스를 시도 하였으나 기존의 포털 서비스 업체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특화된 서비스 개발을 통하여 다시금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90년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기존의 틀에서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군인이 아닌 정치가가 정치를 시작함으로 전보다는 자유로운 정치 토론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인한 군사적인 긴장감이 잠시나마 조성이 되었으며, 문화와 스포츠도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후반에 이르러서는 IMF의 한파를 맞으며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 메어야 하는 시절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쿠플런드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된 “x-세대”의 등장은 사회전반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접하였기에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PC통신을 통하여 그들의 솔직함과 그들의 개성을 사회에 표출 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채팅을 통하여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도 이 당시였는데 유저들은 빠르게 약속을 정하고 만남을 수행할 수 있는 이 만남을 번개라 칭하였으며 많은 이들이 동참하였다.
1997년 관객동원 1위를 기록한 “접속”은 PC통신의 채팅을 소재로 67만명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들였으며 이는 PC통신의 채팅이라는 문화가 얼마나 사회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구성원의 공감을 가졌는가에 대한 증거이다.
게시판은 서로 토론을 하거나 자신이 겪은 일들, 재밌는 일 등을 기록하는 곳이었다. PC통신 게시판에 연재되던 소설인 엽기적인 그녀는 2001년 영화로 제작되어 488만 관객을 불러 모았고, 퇴마록과 묵향 등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문 작가나 관계자가 쓴 것이 아니라 PC통신에서 활동하는 일반인들이 직접 글을 쓴 것 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등장은 시간과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취미나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의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 할 수 있었다. 이는 침목과 정보 교류 장으로 활용 되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모임이 만들어 졌다. 온라인상 부족한 부분이나 오프라인상의 만남을 가져야 할 경우 정기모임을 통하여 보충 하였고 젊은이들의 사회 전반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일조를 하였다.
또한 ‘반갑습니다’의 줄임인 ‘방가’, ‘정기모임’의 줄임인 ‘정모’, ‘당근’(당연하다), ‘즐’(즐겨라) 등의 신조어나 줄임말들과 [^^;], [ㅠ.ㅠ] 등 다양한 이모티콘이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다. 한때 국어 파괴라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 되어 갔다.
우리는습관적으로 메일함에 메일들을 휴지통으로 보내고 있다. 몇 달 정리하지 않은 받은메일함은 삭제하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소비하게 한다. 스팸, 광고 메일도 없던 PC통신 시절 “한통의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면 얼마나 큰 설레임과 기대감이 존재 하였는가?
처음 업로드를 하던날 ‘누군가에게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유만으로 오랜시간 컴퓨터를 켜놓고 비싼 정보료를 제공하였던 그 따뜻한 시절이 있었다. 광범위 하진 않았지만, 결속력 있고 따뜻했던 그 당시의 커뮤니티 유저들 간의 관계 분명 PC통신시절에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익명성을 보장으로 난무하는 악성 댓글들과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스트레스도 없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