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06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파트너를 이루어, 브랜드에는 매출을 올려주고 디자이너에게는 디자인 역사에 이름을 남기도록 한 사례는 많다. 그중에서도 여기 소개하는 이들의 경우엔 단지 자신이 속해 있던 브랜드의 가치를 높인 것만으로 존경받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작업은 그 자체로 각자의 분야에서 불멸의 영향력을 남기며 후세의 디자이너들에게 길을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IBM의 폴 랜드, ‘하이-테크’를 의미했던 시각 어휘를 남기다
본래 가로 줄무늬 로고는 폭이 제각각인 I, B, M이란 글자들의 조합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 시작된 발상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뢰와 기술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하나의 시각 어휘가 되었다. 폴 랜드가 IBM에서 한 일은 CI 디자인뿐만이 아니다. 폴 랜드가 IBM의 일을 맡기 전까지 IBM은 외부 디자이너들에게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디자인을 의뢰했고, 브랜드 이미지에 일관성이 없었다.
IBM은 폴 랜드와 MoMA의 큐레이터였던 엘리엇 노이즈를 초빙해 전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통합된 기업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제품 디자인을 맡은 마르셀 브로이어, 디스플레이를 담당했던 찰스 임스 부부,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은 밀턴 글레이저처럼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를 주었다. 1956년부터 1991년까지 IBM의 디자인 자문 역을 맡았던 폴 랜드는 브랜드 전체의 아트디렉터이기도 했던 것이다.
21세기, PC의 보급률은 20년 전에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지만 정작 IBM의 전성기는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2007년, IBM은 PC 부문을 중국의 레노보(Lenovo) 컴퓨터에 매각했다. 하지만 IBM 싱크패드(Thinkpad) 노트북에 붙어 있던 로고만큼은 그 후에도 한동안이나마 마니아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IBM 싱크패드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냐고 물으면 항상 “검은 상자 같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과 키보드 가운데 박힌 빨간 포인팅 디바이스, 그리고 삼색으로 된 줄무늬 IBM 로고”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글/ 정영호 기자
알레시의 알레산드로 멘디니, 주방용품에 철학과 유머를 담다
많은 소품 디자인 업체들이 키치적으로 전락하는 데 비해, 알레시는 기존 상품의 관행과 진부함에 대한 반기를 들고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력을 새롭게 하기에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을 제공한 사람 중 한 명이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1979년부터 알레시의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1980년대에 알레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80년대 초 에토레 소트사스, 알도 로시, 필립 스탁 등 11명의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차와 커피 세트: 광장(Tea & Coffee: Piazza)’은 알레시를 생활용품의 명품 브랜드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년 후인 2003년에는 또 한 번의 프로젝트 ‘차와 커피 세트: 타워(Tea & Coffee: Towers)’로 비토 아콘치, 시게루 반, 자하 하디드, 이토 도요, 장 누벨 같은 건축가와 함께 알레시의 미래를 제시해보았다.
하지만 멘디니가 알레시를 위해 디자인한 제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안나 G(Anna. G)와 알레산드로 M(Alessandro.M)이라는 와인 코르크 따개일 것이다. 멘디니 자신의 이미지를 본뜬 이 코르크 따개는 색칠을 다르게 한 다양한 버전이 있다. 두 와인 따개의 실루엣이 다르고 마개를 뽑는 방식 또한 다르다는 것이 힘이 다른 남녀의 차이를 연상케 하는 것도 재미있다.
글/ 정영호 기자
AEG의 페터 베렌스, 최초의 CI 작업을 하다
페터 베렌스는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하나는 모더니즘 건축의 대부들인 르 꼬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모더니즘 사상을 주입한 스승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요즘으로 말하면 독일의 문어발 기업인 AEG의 시각 이미지를 통일시킨 작업으로 최초의 CI를 한 디자이너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AEG는 방대한 사업과 규모, 그리고 훌륭한 제품에 비해 기업의 일관된 이미지가 없었다. AEG는 1906년 당시 아름다운 서체를 만들어내 디자인계에서 각광받고 있던 페터 베렌스에게 팸플릿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는 당시 혁신적인 모더니즘 사상을 가진 디자이너였다. 그의 그런 사상은 AEG 경영진에게 먹혀들었다. 그는 팸플릿뿐만 아니라 AEG의 아르누보식 로고를 가독성 높으면서 간략하게 다시 디자인했다.
여기서 나아가 AEG의 유명한 상품인 주전자, 선풍기, 냉장고까지 대량생산에 적합한 형태로 디자인했다. 일관성 없고 세련되지 않았던 AEG의 기업 이미지와 제품 스타일은 이로써 소비자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단일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이후 수많은 기업에서 하게 되는 CI 작업의 원형이 된다. 페터 베렌스는 20세기에는 혁신적인 제품과 함께 소비자에게 세련되고 일관된 이미지를 심어줘야 기업이 성장할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한 뛰어난 수석 디자이너였다.
글/ 김석희(시각문화 평론가)
페이스의 네빌 브로디, 포스트모던 그래픽 디자인을 만들다
1957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네빌 브로디는 런던 칼리지 오브 프린팅(London College of Printing)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페티시(Fetish)’라는 레코드 회사에서 음반 재킷 디자인을 하기도 하고,
<아레나(arena)>
<템포(tempo)>
<퓨즈(fuse)>
등의 잡지도 디자인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디자인했던 잡지
<페이스(the face)>
일 것이다.
네빌 브로디는 그의 생각에 단지 전통이라서 남아 있는 요소들에 대해선 대수술을 감행했다. 그 결과 파격적인 타이포그래피와 레이아웃이 탄생했다. 예를 들어 ‘목차(Context)’라고 쓴 글씨는 점점 변형되어 나중에는 하나의 심벌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천천히 변해갔다는 점에서 디자인 작업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형태 변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가 어떻게 ‘실험’을 전개해나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글/ 정영호 기자
페이스(the>
퓨즈(fuse)>
템포(tempo)>
아레나(arena)>
브라운의 디터 람스, 가장 독일다운 디자인을 고집하다
독일 제품만큼 강력한 아이덴티티, 누가 봐도 독일 제품이라는 것을 형태로 드러내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 전통을 만든 디자이너가 바로 디터 람스다. 그는 독일의 바우하우스 전통을 살려냈다.
그가 1950년대 브라운에서 한스 구겔로트와 디자인한 전기 면도기, 오디오, 텔레비전, 라디오 같은 제품은 하나같이 무미건조할 정도로 기능에 충실하고 장식을 배제했다. 색상도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허영을 떠는 것 같은 장식적인 제품들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브라운을 크게 성공시켰다.
“우리는 기능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하고 자연스러우며 조화로운 형태를 통해 기능이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으면 아주 기뻐한다.” 디터 람스가 ‘브라운의 디자인에 관하여’라는 강의에서 한 말이다. 디터 람스가 브라운 제품을 통해 확립한 디자인, 기능만을 드러내고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디자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어 브라운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글/ 김석희(시각문화 평론가)
여러 디자이너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디자인의 최고 결정권자인 CEO의 미적 안목과 디자이너의 의견을 신뢰하는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CEO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기존 제품을 살짝 뒤틀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직접 광고 기획에 관여하고, 심지어 과감한 퍼포먼스로 그 자신이 살아있는 광고가 되는 CEO들을 만나본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지만, ‘된장녀’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었고 스타벅스 종이컵이 바로 이 된장녀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스타벅스 커피의 원가 또한 여러 의미로 논란의 대상이지만, 어쨌든 스타벅스의 콧대 높은 가격은 커피의 재료나 품질 자체보다는 브랜드 가치에서 나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스타벅스 회장인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경험’을 충족시킬 두 가지 디자인을 고안해냈다. 하나는 인테리어를 포함한 스타벅스의 매장 분위기를 발명한 일이다.
스타벅스 매장은 커피 마니아가 경영하는 커피 전문점 같은 깊이는 부족하겠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같은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스타벅스 카페 특유의 인테리어는 가정집보다 세련되고 직장보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타벅스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컵이다. 하워드 슐츠는 종이컵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라는 문화를 정착시켰다. 특히 스타벅스의 종이컵은 녹색과 검은색으로 된 스타벅스 로고가 흰 바탕과 커다란 컵의 사이즈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어떤 소비자들에게 이 컵은 자신 또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거리 한복판에서도 증명해주는 신분증일지 모른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보면, 스타벅스는 이 매력적인 종이컵 디자인 하나로 매일 거리 곳곳에 걸어 다니는 스타벅스의 광고판을 공짜로 설치하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 정영호 기자
DK의 피터 킨더슬리
백문이 불여일견. 이 말을 돌링 & 킨더슬리(Dorling & Kindersley, 이하 DK)의 책보다 더 잘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DK는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을 본격화했다. DK의 출판물에선 이미지가 책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언제나 큼직하고 선명한 그림이고, 그림에 덧붙인 짤막한 글이 미처 설명되지 못한 부분을 뒷받침한다.
이렇듯 보는 요소가 우세한 책을 만든 것은 창업자 중 한 명인 피터 킨더슬리(Peter Kindersley)가 디자이너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디자이너로서 장식적인 요소를 넣고 싶은 충동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디자인의 연속성과 조화를 위해 지나치게 여러 앵글에서 찍은 사진을 무분별하게 혼용하지 않았다. 대상물의 외곽선을 따낸 소위 ‘누끼’라고 하는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글을 요약하고 발췌하는 일이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하고 핵심적인 요소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라면, 배경을 생략하고 사물만을 잘라 보여주는 그의 기법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요약 발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정보를 생략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규칙은 시각 정보에서도 유효하다. 아니, 시각 정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더 필요하다. 때로 이미지는 단순할수록 강력하다는 것, 피터 킨더슬리는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글/ 정영호 기자
소니의 오가 노리오
모리타 아키오에 이어 소니의 두 번째 회장이 된 오가 노리오는 도쿄통신공업을 세련된 글로벌 브랜드 ‘소니’로 키운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원래 음악을 전공한 오가 노리오가 입사하고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소니의 제품 디자인과 소니 로고를 세련되게 바꾸자는 것일 만큼 일찍이 디자인에 눈을 떴다. 그는 입사 초기 디자인 실장과 광고선전부장을 겸임하면서 일본의 경쟁사들보다 훨씬 일찍 소니를 세련된 이미지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사실 1960년대는 일본의 기업조차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내 주요 임무는 소니 브랜드 이미지 향상과 디자인 통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디자인 선진화에 힘을 쏟았다. 광고선전부장으로서 그는 신문광고에서 로고의 위치와 디자인을 모두 통일시켰다. “음향 기기 같은 제품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내려면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지 않고 검은색과 은색 또는 회색과 은색으로 조합하는 편이 좋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검은색과 은색의 조합은 내가 생각해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소니는 연매출액이 1조 엔이었으며, 이후 4조 엔으로 늘어났다. 그는 자신이 소니에 공헌한 것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상품 개발과 소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 마케팅”에 있다고 자평했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과 무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 글/ 김석희(시각문화 평론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을 창립한 스티브 잡스는 프로그래머가 아니다. 동료들의 기억에 따르면 애플이 초기 제품을 만들 때 워즈니악이 죽도록 일하는 동안 잡스는 콜라와 사탕을 사다 주는 일이 전부였을 정도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최종 사용자에 초점을 맞추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특히 케이스처럼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에서는 말이다.
스티브 워즈니악의 야심작인 ‘애플 Ⅱ’로 큰 성공을 거두고 회사가 승승장구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플 Ⅱ는 그야말로 워즈니악 한 사람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스티브 잡스가 개발한 것이 바로 GUI(Graphic User Interface)다. 오늘날 누구나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아이콘과 윈도, 마우스를 활용한 인터페이스 방식이다.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센터에서 진행 중인 명령어 입력 방식이 아닌 마우스와 아이콘을 활용한 인터페이스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것을 애플이 개발하도록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이 인터페이스를 활용한 컴퓨터인 ‘매킨토시’를 출시했고, 세계 컴퓨터 업계의 젊은 천재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이처럼 디자인에 관한 그의 뛰어난 안목은 그를 늘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는 개척자로 인식시켰지만, 이로 인해 큰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매킨토시는 디자인과 사용법이 뛰어났지만 호환 프로그램이 별로 없어 결국 매출액이 감소하여 자신이 만든 회사인 애플로부터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애플에서 나와 새로 만든 회사인 넥스트에서 첫 번째로 출시한 컴퓨터 역시 실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결국 디자인에 대한 남다른 안목으로 그는 아이맥, 아이팟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히트로 다시 컴퓨터 업계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한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수석 디자이너형 CEO인지는 다음의 말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디자인을 겉치레로 여겼다. 실내 장식 같은 것, 커튼이나 소파의 무늬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영혼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라는 외양으로 표출되는 영혼이다.
글/ 김석희 시각문화평론가
이케아의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의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은 구두쇠인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되었음에도 대형 마트의 세일 기간과 할인 쿠폰을 꼭 챙긴다. 집도 30년 이상 되었고 승용차도 10년 이상 타고 다닌다. 그러면서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토록 창업자가 ‘경제적인 물건’을 좋아해서일까? 이케아 매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너무도 저렴하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살인적인 물가로 악명 높고, 이케아가 시작된 스웨덴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케아 매장에서만큼은 예외다. 그렇다고 이케아가 무턱대고 싸구려 물건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1000달러짜리 좋은 책상을 만드는 것은 쉽다. 하지만 50달러짜리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디자이너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의 철학이다.
이케아의 ‘빌리(Billy)’ 책장만 해도 1978년 처음 출시한 이후 3200만 개 이상이 팔렸다.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디자인과 어느 정도 이상의 품질을 갖추지 못했더라면, 과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케아의 가구를 구매했을까? 이케아의 가구는 저렴하면서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한다. 그리고 디자인은 일견 소박하고 심플해 보이지만, 그조차도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또 다른 변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싸구려이지만 결코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다.
버진의 리처드 브랜슨
버진(Virgin) 그룹이 웨딩 서비스 업체인 ‘버진 브라이드’를 시작했을때, 서비스 홍보를 위해 몸소 짙은 화장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던 버진 그룹의 CEO는 ‘건장한 남성’인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이었다. 이렇듯 리처드 브랜슨은 자신이 이끄는 버진 그룹이 새로운 사업을 벌일 때마다 ‘광대’ 역할을 도맡아 다른 기업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버진콜라’를 내놓았을 땐 코카콜라에 압승을 거두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탱크를 몰고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코카콜라 간판을 향해 포탄을 쏘는가 하면, 기구를 이용한 세계일주에 몇 번씩이나 재도전한 것 또한 화제를 모았다. 버진 그룹의 로고가 결정된 과정도 흥미롭다. 버진 그룹은 레코드를 파는 것으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히피 문화가 유행할 때는 벌거벗은 여인을 로고로 사용했지만, 펑크가 등장하자 좀 더 활기찬 이미지가 필요했다.
브랜슨과 닉은 회사의 디자이너에게 회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고, 디자이너는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낙서한 메모를 바닥에 버렸다. 하지만 브랜슨은 화장실에 가던 중 우연히 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 유명해진 버진의 사인이다.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리고 CEO의 요구를 들으면서 만든 거다. 그러니 부족할 것 없잖아?’ 라고 생각했을 듯한 그의 자유로움이 드러난 또 하나의 일화다.
글/ 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