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5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의 디자인’을 만들어 왔다.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닌, 만들어야 하는 것을 만드는 것.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유 없이 온 일상이 무미건조해지는 기분은 거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스스로 클라이언트가 된 사람이 있다.
다담디자인어소시에이트(이하 다담디자인)의 정우형 대표는 92년부터 스스로에게 크리에이티브를 의뢰해왔다. 디자인에 필요한 일이라면 누가 시키기 전에 먼저 나서서 일을 진행해 왔던 그의 디자인 키워드는 선행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역량을 통해 연역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정우형 대표를 만나 진짜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들어봤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실패는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순식간에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다. 높이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든, 낮은 곳에서 떨어지든 한번 넘어져본 사람은 다시 넘어지지 않으며 넘어지더라도 덜 다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다담디자인의 정우형 대표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험난한 정글로 뛰어들면서 한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한 리더들이 그렇듯, 그 역시 툭툭 털고 일어나 국경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담의 디자인’을 수출하며 각종 디자인 어워드에 이름을 올렸다. “디자인 어워드에 대한 관심도, 도전하는 사람도 없던 때, 주위의 권유로 도전했던 것이 유효했다.”는 정우형 대표가 이끄는 다담디자인의 성장과정은 어떠했을까.
다담디자인을 설립하기 전, ㈜금성사 디자인종합연구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아무래도 조직 생활이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에 맞춰 진행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었다. 많이 고생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일을 찾아서 하는 편이었다. 디자인을 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것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곤 했다. 입사 초기에 전자레인지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그때 클라이언트가 200여 개 정도 됐다. 제품은 몇 개 안되는데 클라이언트가 다 다르다 보니 일의 가짓수만 많아지고 복잡해서 클라이언트 별로 요구사항을 나누고 그것을 반영한 결과를 병풍처럼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개인적으로 도스 프로그램을 짜 클라이언트를 관리했다. 잘해서 시킨 건지 무식하게 자꾸 일을 만드니까 시킨 건지, R&D팀을 새로 만들면서 최연소 팀장을 맡게 됐다. 그러다 90년에 퇴사하고 92년에 다담디자인을 설립했다.
조직 생활을 하던 디자이너가 독립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다담디자인을 설립하기 전에 속된 말로 한번 말아먹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다담디자인을 설립하기까지 2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디자이너가 40명 정도 되는 새로운 조직을 꾸렸는데, 당시에는 그 정도로 큰 규모의 회사가 없었다. 처음이다 보니 쉽지 않아 결국 문을 닫게 됐고 그 다음에 설립한 것이 다담디자인이다.
디자인은 크리에이티브가 핵심이고 그걸 탄탄히 다졌을 때 많은 부분들이 해결돼야 하는데 크리에이티브만 가지고서는 어렵다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크리에이티브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크리에이티브도 중요하지만 제품디자인의 경우에는 기술적인 문제라든가 자금이라든가 주변에 있는 것들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담디자인의 키워드는 ‘선행디자인’이다.
선행디자인은 말 그대로 미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의뢰인과 상관 없이 디자인이 가진 문맥을 기본으로 노하우나 시장 예측을 통해 디자이너가 가진 생각을 미리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 시장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저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디자인에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 디자이너가 디자인 컨셉트를 생각한 다음 거기에 기술이 결합되는 것이 진짜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가진 짤막한 지식을 꺼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료와 통계, 조사를 분석해 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가 제품이나 컨셉트로 발현돼서 기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
다담디자인의 활동은 상당히 ‘글로벌’하다.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다담디자인은 99년부터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국내에서는 제일 먼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아무래도 인지도가 제일 어려운 문제였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디자인이 어떤 수준인지 모르는 상태였고, 다담디자인이라고 하면 더더욱 몰랐으니 말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정보 수집도 쉽지 않아서 누굴 만나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소위 컨택 포인트를 못 찾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호텔에서 선행디자인에 대해 발표도 하고, 초청도 하면서 컨택 포인트도 찾고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 왔다.
해외 디자인 시장에 다담디자인을 어필했던 노하우는 무엇인가.
다담디자인의 홈페이지(www.dadam.com)를 보라고 말한다. 기업과 대표가 가진 생각, 그리고 기업의 포트폴리오는 쉬워야 한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보여주고, 후하게 접대한다고 해도 결국 판단의 끝은 ‘좋다’와 ‘나쁘다’가 전부다. 물론 그런 것들이 판단에 참고는 되겠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담디자인이 이런 생각을 가진 회사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홈페이지 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불경기다. 다담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글쎄,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 싶은 생각도 든다. 불경기 속에서 오히려 히트 상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이 오면 진정한 디자인이 빛을 발할 수 있다. 불경기라고 해서 디자인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상품에 대한 수요는 있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효율성이 극대화 되어야 해서 아이디어 상품이 쏟아진다. 디자인도 이 ‘아이디어’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립스, 인텔, 지멘스, 아모이모바일 등 해외 유수의 기업에 디자인을 수출하고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자프, 미국의 알티튜드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다담디자인. 정우형 대표는 “무엇보다 우리 식구들의 역량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기업의 대표이자 산업디자이너의 눈에 한국의 디자인은 어떤 모습일까. 정우형 대표는 대중과 디자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면 자연스레 디자이너와 디자인의 수준도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디자인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보다 먼저 디자인 수준에 대한 것인지, 디자이너의 수준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상품 디자인에 대한 것인지를 구분했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는 상품 디자인에 대한 얘기인데, 그건 대강의 데이터가 있긴 하다. 한국을 100으로 보면 미국이 110이고, 프랑스가 115고… 하는 수치들. 하지만 그건 기업이 평가 받을 문제라고 본다.
디자인의 수준은 결국 디자이너의 수준인데, 이것도 두 가지로 나뉜다. 밖으로 드러난 실력과 잠재된 실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잠재력을 드러낼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뉘앙스 밖에 안 비춘다. 기회가 없으니까. 월간정글도 UCC를 표방하고 있지 않나. 덕분에 신진 디자이너들이 많이 나와서 좋긴 한데, 이런 출구가 아직 부족하다. 겉으로 드러나질 않으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수밖에 없다.
사실 디자이너의 잠재력은 굉장하다. 예를 들어 밖으로 드러난 것을 기준 삼아 우리나라 디자인의 수준을 따졌을 때 100이라고 보자. 디자이너의 수준이 80이라면 기업이 중간에서 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디자이너의 수준이 120이라고 하면 전체 디자인 수준이 디자이너보다 낮은 것이고,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냥 섞어놓고 디자인 수준이 얼마니까 더 노력해야 한다는 접근으로는 발전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디자이너들이 좋은 생각을 공개하기 꺼려한다. 이 아이디어라면 큰 돈이 될 거야, 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드러내지 않으려는 게 있다. 디자인 자체를 아무 부담 없이 즐기고 공유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내 것’이라고 가둬두는 것이다. 일반인들도 디자인은 특별한 것이라며 거리를 두고.
이것 말고도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는 디자인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예컨대 서울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다. 압구정하면 첨단 패션의 로데오 거리가 생각나고, 홍대하면 클럽의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생각나는 것처럼 지역별로 대표적인 문화가 있지 않나. 이것들이 모두 디자인과 관계가 있다. 신당동 먹을거리 투어를 한다고 하면, 디자이너가 들어가서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거다. 음식 자체가 디자인이지 않은가. 보기 좋은 게 맛도 있다고 그릇부터 음식 모양까지 조언해주면서 시민들과 같이 즐기는 거다. 그런 요소들을 만들어 놓으면 대중은 생활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인식하고 섞여서 놀 수 있게 되고, 자연스레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거다. 자꾸 사회 곳곳에 퍼뜨려야 한다. 그래서 요소요소 바뀌고 문화가 되어야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도 생길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가.
나무를 다루면 목공예, 유리를 다루면 유리공예라고 구분 짓고 산업 쪽에서 뛰는 사람들은 디자이너로 부른다. 자꾸 나누고 구분을 짓는데, 나는 다 같은 ‘디자인’으로 보고, 나눠 놓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과 공예를 합쳐보자는 생각으로 문화상품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해석해 개발하고 런칭시키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의 하르방은 극히 일부분인데, 이걸 다시 조사해서 제품으로 개발하는 일을 했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디자인 관련 법을 손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한 3년 전쯤 국회의원 입법을 추진하려고 현재의 법보다 상위개념으로 접근한 디자인법의 초안을 만들기도 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때문에 상정되진 못했는데, 최근 설치된 국가 디자인 위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두를 던져놓고 끝까지 챙기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논의 되고 조금씩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디자이너들의 매너리즘, 혹은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 디자이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약돌에 비유하기를 좋아하는데, 갓 대학을 나온 디자이너는 예쁜 조약돌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석으로 가공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자만심 때문이라고 본다. 흙은 뭉치면 뭉쳐지는 데 조약돌은 쌓아지지도 않고 뭉쳐지지도 않는다. 조약돌이 보석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안 된다고 본다. 디자이너 개인의 크리에이티브가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단순히 생각만으로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프라를 통해 디자이너의 깊이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아쉽다.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를 길게 보면 60년 정도 되는데, 외국은 그 이상이다. 그만큼의 인프라가 있으니 근본적인 크리에이티브를 뺀 나머지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1명의 디자이너가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10명이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0명이 뭉쳐지질 않는다. 결국 자신이 예쁜 조약돌이라고 생각해서 독립하려고 든다. 독립도 좋지만 그보다 어떻게 하면 내 크리에이티브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지금의 환경과 조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외국의 디자인이나 디자이너를 보고 배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으니 공부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무조건 좇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젠 스타일(Zen style)에서 ‘Zen’은 선(禪)을 의미하는데 이건 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이다. 서양에서 젠 스타일이라는 걸 먼저 들고 나온 것뿐이다. 이게 유행이니 이렇게 해야지,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쫓아가는 게 된다. 젠이라는 개념이 그게 아니고 이런 거라고, 우리가 생각한 건 이건데 너희가 잘못 해석한 거라고 비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작업을 거듭해야 항상 위에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매력이 서양인 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서양에서 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서양이 항상 앞서있고 우리는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채부터 의자에 대한 개념이나 화약까지 모두 동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뿌리를 알고, 좇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신감이 충분히 생길 거고, 자신감이 생기면 출구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업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디자인은 트렌드를 만들어야 한다. 좇아가기 보다 좇아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패션처럼 피라미드 형태의 시스템을 가진 분야는 패션쇼를 통해 미리 예측하고 소스를 던져준다. 디자이너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을 것이다. 디자이너라면 트렌드를 만들어 가야지, 따라가서는 곤란하다. 개척자 정신을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품이 나오기까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씩 걸리는데 현재를 보고 1년 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우선해야 하고, 지혜보다는 직관이 있어야 한다. 설명은 잘 못해도 이렇게 갈 것이라는 직관. 굉장히 중요한데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받으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니 일이 복잡해 지는 거다. 하지만 좋은 클라이언트, 안목이 있는 클라이언트는 설명하지 않아도 보면 잘 될 것인지 아닌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