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6
어두움을 응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슈퍼맨처럼 힘이 세지도, 배트맨처럼 돈이 많지도 않은 갑남을녀의 입장에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 하지 않는 일에 유독 마음을 쓰는 이들이 있다.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오로지 상식을 지키기 위해 뛰는 사람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이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박은선을 처음 만난 곳은 조계사 한 켠에 자리한 조그마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였다. ‘스페이스 모래’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천성산 개발반대운동을 홀로 이끌었던 지율스님이 조성한 곳. 그녀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담은 잡지를 만들던 2009년 당시에 처음 지율스님을 만났다.
“잡지를 만들면서 동시에 테마를 가진 서울 투어를 진행했었어요. 청계천 녹조 투어라던가 동대문이나 신당역쪽을 중심으로 투어를 진행했죠. 투어 코스 중 하나로 4대강 답사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스님을 만났죠. 저는 불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스님이 제가 미술을 하는 걸 아시니까 같이 작업을 진행해보자고 하셨어요.”
디자인액티비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박은선이 주축이 된 디자인 그룹 리슨투더시티와 친환경적인 디자인을 고민하는 디자인회사인 슬로우워크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이들은 예술과 공예, 그리고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품을 물질적인 교환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고민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사실, 디자인은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고, 일정량의 교환가치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소비되었던 디자인을 어떻게 다른 가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해보고자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4대강에 대한 것이고 추후 진행되는 세미나는 디자인 서울에 대해 다뤄보고자 해요. 개발독재와 디자인 서울의 관계성을 찾아보는 것이죠.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논리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메커니즘이 하나도 변한 것이 없거든요. 이 상황에서 디자이너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함께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어요. 이런 고민을 함께 할 분들이라면 회사에서만 일하시던 분이던, 개인 작업만 하시던 분도 상관없이 함께 가보고 싶어요.”
박은선은 원래 순수미술을 하던 작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참, 많은 일들을 한다. 박은선은 신당창작아케이드에 입주해 있는 작가이고, 사회과학연구소 수유너머N의 연구원이다. 더불어 그녀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일뿐더러, 4대강 건설 현장을 뛰어다니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질 만도 하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든 걸까?
“어릴 때부터 쭉 살아온 동네가 동덕여대 근처의 월곡동이라는 곳이에요. 그냥 산동네죠(웃음). 그 곳에서 살아오면서 아주 어릴 적부터 저는 도시가 절대 화려하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미술을 하면서도 소장할만한 예쁜 작품 보다는 좀 문제적인 작품들을 많이 했었죠. 오빠의 이라크 파병을 통해 기획하게 된 ‘보양식’ 시리즈라던가, ‘즐거운 공포’ 같은 시리즈가 그런 것이었어요. 작가를 하면서 많이 느낀 건데 미술작품이 가진 자들의 허영의 대상밖에 안 되는 현실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뛰쳐나오게 된 거고요.”
미술이나 디자인은 여타의 예술 장르와는 다르게 사회변화에 대해 둔감한 편이라고 한다. 사회적인 이슈보다는 내면의 이야기에 천착하는 작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하지만 박은선은 이러한 현실이 조금 더 다른 양상으로 바뀌길 원한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는 이런 현실을 바꿔보고자 하는 조그마한 몸부림이다.
“도시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작가들이 많긴 하지만 정말 사회적인 색깔을 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삶과 예술이 하나로 가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해요. 비 정규직이 일반화되고 경쟁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도 마찬가지에요. 얼마 전, 카이스트에서 총장퇴진을 위한 서명을 받았는데 퇴진에 찬성하는 학생들이 5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요. 나머지 50%는 자신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자신감 같은 것이 있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도 자신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등록금 투쟁은 안 하지만 편의점 가서 10% 할인 못 받으면 열 받는 게 요즘 친구들이에요. 이상한 확신이죠.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그게 내 일이 아니고 당사자가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거에요. 잘못된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저 같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은 필요하잖아요?”
박은선이 함께 하는 공간, 스페이스 모래는 얼마 전 홍대 앞에 위치한 두리반 옆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두리반은 2011년의 대한민국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리고 천성산의 도룡뇽이나 담양의 쑥부쟁이와 같이 스러져가는 생명을 돌아보는 일은 점차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디자인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