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8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 이른바 ‘3저 효과’로 높은 성장을 이룩한 1980년대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개인소득의 향상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소비영역이 팽창하면서 본격적인 대중소비시대로 접어들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던 이 시대에는 물질적 풍요와 정부에서 실시한 일련의 문화정책으로 대중의 소비의식과 문화적 욕구도 높아졌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대중의 문화적 욕구의 가장 중심에 있었던 자동차는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자마자 사람들이 구매하는 주요 품목이 되었다. 자동차가 이러한 소비욕구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산업생산력의 확장이 이 시기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산업은 설립 초기 막대한 설비와 자본이 투자되는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대량생산의 최소 규모 (공장 단위로 볼 때 30만대, 기업 단위로는 200만대)를 갖추었을 때 제조원가를 낮출 수 있는 규모의 경제 효과에 지배받는 대표적인 산업이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기업단위에는 못 미치지만 현대를 중심으로 30만대 규모의 개별 공장들이 준공되고 이를 통해 제조원가를 낮춤으로서, 사람들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전보다 자동차 가격이 상승했지만, 그 상승폭이 평균 물가 상승률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격이 대폭 낮아진 것과 같았다. 이처럼 규모의 경제 달성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주요 원인이었으며, 이러한 양적 성장은 기업이 주도적으로 세계 자동차산업의 변화에 대응하여 대량수출을 이루어냄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현대의 엑셀, 기아의 프라이드, 대우의 르망은 바로 이러한 한국자동차산업의 발전을 이끈 주역이었다.
자동차산업이 기업중심의 발전구조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기업과 정부 주도의 정책을 유지하려는 정책기관간의 힘겨운 갈등이 있었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부의 자동차산업 육성은 국내 산업간 불균형을 초래하고, 육성대상 산업의 과잉 또는 중복 투자로 인한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게다가 70년대 말 일어난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세계 경제의 침체와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자동차 수출은 둔화되고, 국내 수요도 줄어 자동차 생산량이 80년에 비해 40%가 감소하는 등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발전설비 및 자동차 분야 통합을 위한 투자조정’(1980) 방안과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1981)를 연이어 발표하여 일부 업체를 자동차생산에서 배제하거나 통폐합하는 강제적인 조정을 실시하려 하였다. 현대와 새한을 통합하여 승용차 생산을 전담하고, 기아와 동아도 합병하여 상용차 생산에 전념하도록 조취를 취함으로써 기업들 간의 과당 경쟁을 피하고 차종별 독점 생산으로 생산 능력을 일원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업의 이해와 상충된 이러한 계획은 현대와 새한이 승용차 부문을, 기아는 1~5톤 트럭버스부문을 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 조치는 브리사를 생산하며 생산 능력을 확대해온 기아에게는 승용차 생산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이자 상용차 시장 독점의 기회이기도 했다. 기아는 이 조치를 계기로 소형화물차 봉고를 개발하여 봉고 신화를 탄생시키며 상용차 생산 메이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초반 정부주도의 정책 제시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정부분 효력을 발휘하여 현대, 기아, 대우의 3개 업체를 중심으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도록 기여했다. 물론 동시에 기업의 대형화와 독점화로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는 부작용 또한 낳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자동차산업의 정책을 주도하던 정부의 개입은 변화가 불가피해졌고,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70년대의 내수 중심의 발전 전략에서 벗어나 기업주도하의 발전 형태로 변화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 미국업체는 미국시장이 일본 소형차로 잠식되어감에 따라 일본에 대미 수출에 대한 자율적 규제를 요청하고, 소형차 및 부품을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에서 제작, 역수입했다. 미국수출과 수출량을 제한 받은 일본 업체가 한국을 대미수출의 우회적 생산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로 형성된 한미일 국제 분업 관계는 한국 업체들에게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냄으로써 대량 수출이 가능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일본차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업체의 해외조달전략에 한국 업체가 참여한데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 한국자동차업체는 생산능력이 부족하고 독자적인 개발과 설계 능력도 취약하여 자동차 부품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기반과 품질수준도 낮은 수준이었지만, 설비확충과 기술개발에 집중한 결과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소형차를 중심으로 거의 완전국산화에 도달했다. 이후에는 중형급으로 확산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생산능력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출산업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79년 20만대, 81년 전 차종 13만대에 불과했던 생산대수는 88년에 100만대를 돌파하여, 10년 만에 5배의 성장을 이루었다.
자동차 산업이 기업 주도로 성장하면서 각 기업은 70년대 기술도입에 의존한 개발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연구개발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밑바탕에는 해외업체의 기술을 도입하면서 지속적으로 축적한 기술이 있었다. 그동안에는 일본, 미국, 영국, 서독, 이탈리아 등에서 주로 차체설계와 조립제조에 관한 기술을 들여왔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부품의 공급과 기술지원, 언어의 소통 등이 용이하여 기술교류가 가장 활발한 나라였다.
현대자동차는 80년대 중반 엑셀 개발을 계기로 본격적인 기술개발체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소(용인 마북리 소재, 84년)를 설치하고, 충돌시험을 비롯, 각종 주행시험을 실시하는 종합주행시험장, 전자기술과 소재, 대체연료까지 자동차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84년)도 울산 공장에 건설하여, 안전성과 경제성 있는 제품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기술연구소가 개소하면서 디자인과는 독립된 부서로 연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스타일링 스튜디오, 모델링, 프리젠테이션, 판금, 목형, 페인팅, FRP 성형시설 등을 갖춘 전문화된 체제에서 독자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82년 엑셀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이와 같은 전문연구체제가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업무의 대부분은 외부 용역기관에서 받은 디자인의 제품화와 모델 변경이 많았다. 이탈 디자인에서 설계한 스텔라를 양산화 하는 과정에서 변형이 필요한 스타일 문제를 해결하거나 포니의 변경모델을 제작하는 보조적인 기능을 유지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디자인 능력이 축적되었고, 디자인 관련 기계 도입을 비롯하여 운영 체계를 더욱 확고하게 갖추어 나갔다. 디자인과 책임자였던 박종서는 디자인을 어떤 경로로 해야 하는지, 재료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해외 디자이너와 재료 생산회사의 세미나를 통하여 디자인 과정과 기법, 재료의 종류와 사용법을 배우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고 이를 통해 자동차 디자인의 프로세스와 방법을 정립해 나갔다고 회고했다.
88년 출시된 쏘나타는 독자적인 연구개발체제를 마련한 이후 처음으로 순수국내기술로 개발한 차량이었다. 쏘나타는 스타일과 마스터 설계, 차체구조설계부문 등의 과정을 독자적으로 진행하였으며, 처음으로 CAD/CAM(Comper aided design/computer aided manufacturing)기술을 적용한 차량이었다. 디자인과 내에 디지털 스타일링 시스템과 전문운영인원으로 조직된 CAD/CAM 기능을 설치하면서 디자인 내에서 디지털 모델을 만들고 실물 제작한 모델과 비교 검토하여 스타일의 품질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쏘나타는 디자인과 차체설계기술부문에서 확고한 기반 구축의 기점이 되며 현대의 성공 신화를 이어갔다. 현대의 차체설계기술은 곧 기아와 대우로도 이전되어 기아의 세피아, 크레도스, 대우의 에스페로 개발에도 적용되었다. 자동차는 디자인, 설계, 금형, 생산, 검사, 재료, 조립 등의 방대한 영역의 기술이 집약되어 완성되고, 기술 진보는 지속적으로 교환되고 교류되기 때문에 어떤 차종이 독자적인 기술 자립을 이룬 기점이 되었다고 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독자적인 제품개발을 계획하고 이에 따른 기술력을 동원하여 제작의 주체가 된다는 면에서 고유모델을 자동차 개발 능력을 갖춘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현대는 75년 포니를, 대우와 기아는 90년 에스페로와 92년 세피아에 각사의 기술 발전의 의의를 둘 수 있다.
제품개발을 주도적으로 이끈 현대자동차와는 달리 기아자동차는 프라이드의 제품 및 생산기술을 마쓰다의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고, 대우는 르망 개발을 위해 GM과 그 자회사인 오펠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이 두 기업은 제품 개발을 해외 기술에 의존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자체적인 기술 능력을 축적하기 위해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기아는 81년 중앙기술연구소와 84년 중앙연구소를 설치하였고, 대우도 83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우는 제휴선인 GM이 제휴회사의 독자적인 제품 개발을 허용하지 않아 기술개발에 한계가 있었다. 대우는 92년 GM과 결별한 이후에야 해외생산기지를 개척하고 영국의 IAD를 인수하여 레간자, 라노스, 누비라를 개발하여 연이어 출시하는 등 적극적인 기술 구축을 시도했다.
1980년대 한국사회가 맞이한 경제적, 문화적인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산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기술의 진보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동차산업이 자리했다. 규모의 경제와 기술능력을 확장하면서 양적 성장을 가속화했던 자동차산업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나갔다.
*참고문헌
박병영,「한국 정부-기업 관계의 다양성과 그 결정요인」,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9
현대기아자동차,『자동차산업 2007』, 2007
「교통신문」, 1982/3/4
박종서 전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장과의 인터뷰 2009.11.01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한국자동차산업50년사』, 2005, pp434-436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과의 인터뷰 2009.12.2
조형제,『한국 자동차 산업의 전략적 선택』, 백산서당, 1993, p174
강명한,『한국차,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우사, 1998, pp255-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