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6
1990년대 들어 디자인은 차종별 소비자층을 명확히 구분하고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분석하며 에어로다이나믹의 유려한 형태에 재미있는 감성을 덧붙인 스타일에 집중했다. 신차종의 개발에서 소비자 리서치와 그에 따른 스타일을 모색하는 프로세스가 강화되면서 디자인은 마케팅 부문과 더욱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 프로세스의 변화는 신세대로 불리는 새로운 소비자 집단의 등장을 계기로 확연히 드러났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90년대 20~30대의 젊은층은 새로운 소비자 집단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성장하면서 생활의 스타일, 취향의 문제에서 이전 세대와는 다른 태도를 가졌다. 신세대로 불리는 이들 세대는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즉 기능적 성격과 신분, 위계 등의 사회적 상징으로 바라보던 보수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이나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놀이의 공간으로 확장했다.
신세대는 기존 세대와는 문화적인 경험이 확실히 다른 세대였다. 신세대는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태어나서 경제적인 풍요와 여유를 즐기며, 교육과 문화 혜택을 받고 자란 세대였다. 이들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미디어 문화에 익숙하게 접해왔고, 급속히 보급된 컴퓨터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세계와 소통하며 성장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신세대는 개인적이며 감각적이고,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향을 가졌다. 이들에게 있어 자동차는 기능적인 사물이라는 측면보다는 감성적인 동기에서 ‘자기실현’의 존재였다. ‘나’, ‘나의 주장’, ‘나의 패션’을 표현하는 코드였으며, 자신을 표현하는 코드로서 스타일이 중요했다. 기본적인 기능에 독특한 미감이 강조된 스타일과 젊고 가벼우며 유쾌한 것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성향은 ‘펀 디자인(fun design)’이라는 용어의 출현을 가져왔다. 펀 디자인은 사물을 통해 느끼는 즐거운 경험을 추구하고 감각적 만족에 탐닉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아이콘으로 삼은 이들의 태도를 반영했다.
90년 출시된 스쿠프는 신세대의 자동차였다. 스쿠프가 국내의 젊은층을 겨냥해 기획된 차량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세단형의 소형차뿐이었던 시대에 스포츠카 모양의 스쿠프는 신세대의 전용차로 자리했다. 스쿠프 이후 이들의 진정한 전용차는 96년 출시된 티뷰론이었다. 티뷰론은 신세대를 목표로 하여 이들이 개성을 맘껏 발산할 수 있도록 계획한 ‘펀 디자인’이었으며, 굉음을 내며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는 역동적 무드를 반영한 스타일이었다. 일부 개성파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나온 디자인에 머물지 않고 차량을 더욱 스포티하고 독특하게 개조하거나 튜닝했다. 이들에게 티뷰론은 젊음과 힘, 자기 자신을 표상하는 코드로서의 사물일 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이며 문화적인 활동 공간으로, 친구를 만나거나, 친구를 위한 이벤트의 공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펀 디자인은 색채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엑센트의 색채는 이전 모델인 엑셀의 보수적이며 무난한 잿빛 색채에서 벗어난 활동적이고 스포티한 색채였다. 엑센트는 팽팽한 곡면으로 처리된 동그스름한 모양에 밝고 채도가 높은 색채로 젊은 감성을 풍겼다. 스칼렛 레드(주홍색), 로벨리아(진보라색), 오팔그린(청녹색), 벨플라워(연보라색) 등을 운영한 엑센트는 회색과 흰색 일색이었던 기존의 색채와는 완전히 다른 밝은 분위기였다. “예쁘고 색깔있는 차- 이제 거리에 컬러혁명이 시작된다.”는 광고 문구는 신차의 출시를 유채색의 밝은 색채로 알렸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아벨라도 진분홍색, 남청색, 자주색 등이 색다른 느낌을 제공했고, “신세대 신감각”이라는 광고카피로 신세대의 감각적 성향을 표현했다. 이러한 화려한 유채색은 출시 초기 자신만만하게 자기 개성을 표현하는 코드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신세대 사이에서 유행한 키덜트 현상 또한 장식적인 미감을 강조하여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코드로 가볍게 즐기는 양상의 하나였다. 키드(kid)와 어덜트(adult)를 합친 이 말은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화영화의 캐릭터를 사용한 팬시상품을 즐기며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태도를 말한다. 특히 마티즈를 비롯한 경차의 등장을 계기로 실내를 캐릭터 상품으로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90년대 자동차 개발은 디자인과 마케팅 부문의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시장에 관한 정보는 디자인 부문으로 신속히 전달되고 스타일 과정에 반영되었으며, 디자인은 각 소비자 그룹의 심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형태에 몰두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디자인은 디자인의 여러 특징들 중에서도 형태와 색채가 지닌 감각적 성격으로 강조되었고, 특히 색채는 이전 것과 다른 것이라는 ‘차이’를 즉각적으로 표시하는 요소로 마케팅 부분에서 자주 활용했다.
참고문헌
강준만/전상민,『광고, 욕망의 연금술』, 인물과 사상사, 2007
마정미,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개마고원, 2004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한국자동차산업50년사』, 2005
디자인하우스「월간디자인」, 1993/6, 1994/9
「교통신문」, 1994/3/31, 199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