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2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길을 걷는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다채로운 간판 속에서 하나의 기호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봄, 가을, 겨울, 여름으로 쓰인 간판이 굽어진 길을 따라 사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추억들이 투영돼 수십 년을 이어오고 있는 광화문 사계의 간판은, 기억이 추억으로 변해가듯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글, 사진 | 월간 팝사인 한정현 기자 hjh@popsign.co.kr
세종문화회관 옆길의 봄·여름·가을·겨울 간판
거리를 걷다보면 문득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하루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분절화 된 일상 속에서 더디게 변해가는 계절이 찰나의 느낌으로 다가올 때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고 했던 문태준 시인도 발밑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밟는 그 찰나에 가을이, 그리고 연이어 지난 옛 사랑의 추억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든 눈에 들어온 간판 하나를 보고 추억에 빠져들게 되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거리를 지나면서 느끼게 되는 계절의 오고 감이 광화문에선 간판으로 달려 있다. 세종문화회관 옆길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름 붙여진 간판들이 길을 따라 사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81년 ‘여름’으로 시작된 광화문의 계절은 몇 년 뒤 가을이 왔고, 봄과 겨울도 광화문에 찾아왔다. 30여 번의 계절을 지나면서 광화문의 사계 간판에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계 가운데 간혹 한 계절이 카페 주인의 사정에 따라 사라지기도 했지만 계절의 빈자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계절처럼, 잠시 사라졌던 간판은 빈자리를 느끼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빈자리를 메우며 순환하면서 지금까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온전한 계절로 광화문 거리를 지키고 있다.
30여 번의 계절은 추억을 낳고...
사계를 찾는 손님들은 추억을 거슬러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1980년대 당시에 대학생이었거나 혹은 광화문 인근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젊은 샐러리맨들이 듬성듬성 자란 새치마냥 희끗해진 조각난 옛 기억을 되살려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젊은 시절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한 결 같이 이곳을 찾는 단골손님의 비율도 상당하다.
‘가을’을 운영하는 현계림 사장은 “옛 추억을 찾아 먼 경기도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의 추억 하나를 가게 속에 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사계 중 ‘봄’을 맡고 있는 이용심 사장은 단골손님으로 대학생 시절부터 봄과 인연을 맺어오다 사정이 생겨 가게를 접어야했던 전 사장으로부터 가게를 인수받아 봄을 가꾸어가고 있다. 이용심 사장은 “20년 전의 사계는 젊은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낭만의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사계 중 여름과 가을은 라이브 카페로 바뀌었고 겨울은 여름을 최초로 만들었던 현정희 씨(2004년 작고)의 딸이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계 중 겨울은 나머지 계절과는 달리 새로운 변화의 길을 택한 셈이다.
예전 분위기를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봄의 이용심 사장은 “20여년 전과 비교했을 때 변한 것은 에어컨과 냉장고, 그리고 딱 1번 새로 바른 벽지 뿐”이라고 말했다. 옛 기억을 되살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 때의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 애써 꾸미려하지 않는 이유다.
간판정비·재개발 등의 변화… 그래도 계절은 오간다
광화문의 사계는 간판과 상호가 세월의 힘을 가져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다. 저마다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공간이지만 사계절이 있어야만 비로소 온전해지는 공동체이자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되었다. 사계가 위치해 있는 거리에는 사계를 비롯해 추억을 콘셉트로 하는 여러 카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장들도 비슷한 추억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탓에 상호 교류가 많은데, 특히 사계의 사장들은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다고.
광화문의 사계 뿐 아니더라도 간판과 가게 이름만으로도 추억이 아련해지는 거리가 있다. 간판의 모양은 예전과 달라졌더라도 그 거리에서 예전과 같은 이름으로 든든히 버티고 있는 낯익은 이름을 볼 때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조우하게 된다.
사계의 간판 중 봄은 광화문 간판정비사업 구역에 포함돼 최근 채널사인으로 새단장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사계 중 옛 기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봄의 겉모습이 가장 많이 변한 것이다. 봄의 이용심 사장은 “이 곳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의 추억들이 쌓여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옛날 모습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게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청진동 피맛골도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계가 이어져 있는 구역도 재개발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들이 오간다. 하지만 문화를 형성한 이름과 추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계절이 오가듯 지금의 사계는 또 다른 곳에서 계절을 이어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