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29
연상퀴즈- 팝아트, 마릴린 먼로, 팩토리, 에디 세즈윅, 바스키아. 아마 모두들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앤디 워홀(Andrew Warhola)이다. 『앤디워홀, 위대한 세계』는 1976년 11월 24일부터 1987년 2월 17일까지 앤디 워홀이 썼던 2만 장의 일기가 엮어진 책이다.
에디터 | 이안나(anlee@jungle.co.kr), 자료제공 l 출판사 열린책들 미메시스
앤디 워홀은 매일 아침 9시 반, 이 책의 엮은이 팻 해켓에게 전날의 일과를 전화로 불러 주었다. 팻은 택시비에 얼마를 썼으며, 식사는 뭘 먹었는지까지 시시콜콜한 하루의 일과를 꼼꼼히 받아 적었다. 이런 작업은 1976년 11월 24일 수요일부터 워홀이 병원에 실려 가기 직전인 1987년 2월 17일 화요일(2월 22일 일요일 사망)까지 계속되었다. 2만 장의 일기 가운데 앤디 워홀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앤디 워홀 일기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팝아트의 기록이자, 당시 뉴욕에서 예술과 대중문화와 사회를 주도했던 사람들 모두의 일기이기도 하다. 한국어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앤디 워홀의 연보’를 자체 제작했다. 독자가 찾기 힘든 자료를 수록해서 원고지 125매 분량의 상세한 연보 외에도 한국어판에는 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고지 220매 분량의 인명사전을 만들었다. 워홀의 주변 인물 중 자주 등장하는 인물을 뽑아 귀여운 북마크도 함께 제작하였다. 일기 자체만 무려 6907매(소설 7권 분량)이며, 정확히 789매에 달하는 인덱스의 항목 수는 무려 4000개가 넘을 정도로 그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John 혹은 Jon으로 쓰는 존이라는 사람의 수가 80명이나 된다). 이 모든 작업은 번역을 시작한 후로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6년 5개월이 걸렸다.
앤디 워홀은 측근들을 주위에 풀어놓는 사람이었다고 머리말은 전한다. 또한 1960년대에 그가 만들었던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나온 사람들을 비롯해 그와 절친한 사람들은 전부 ‘앤디 워홀의 슈퍼스타’로 묘사되었다. 앤디 워홀의 잡다한 분야에 대한 관심은 영화 제작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과 재킷 작업, 그리고 1969년 잡지 『인터뷰』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인터뷰』의 발행 부수는 언제나 10만 부를 밑돌았지만 분량은 1976년 당시 93페이지에서 1979년에는 400페이지로 늘어났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앤디 워홀은 한 번도 인쇄 매체에 노출된 적 없는 젊은 미남 미녀들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었고, 이렇게 『인터뷰』는 당시 가장 매혹적인 잡지의 하나가 되었다. 워홀은 일기에 『인터뷰』에 들어가는 스무 살이 넘은 사람들의 사진은 전부 수정 작업을 거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스티븐 스필버그, 폴 모리세이 등 영화 제작자 및 감독들뿐 아니라 작품의 소재로 쓰였던 마릴린 먼로, 조앤 콜린스,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 잭 니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트라볼타 등의 무비 스타들, 존 레논, 프린스, 카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의 뮤직 스타들, 마지막으로 트루먼 카포티, 테네시 윌리엄스 등의 작가들과 같이, 당시에 유명세를 떨쳤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앤디 워홀은 예의 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일을 ‘강요’하는 적도 없고, 모두를 존중하며 누구도 천대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했고, 그들이 맡은 일을 잘해낼 때도 감사해했고, 사소한 일에는 특별히 더 감사해했다. 죽기 전에 팻 해켓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도 ‘고마워요’였다고 일기는 전한다. 그는 캐서린이 고양이 지미가 카펫에 오줌을 쌀까 봐 고양이를 안락사 시키려 하거나(1983년 9월 22일) 브리지드가 병든 고양이 빌리를 없애 버렸을 때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일기에 언급했다(1981년 5월 5일). 바쁜 틈에도 팩토리 직원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1982년 22월 26일), 택시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는 언제나 누군가를 태웠다가 내려 주거나 어디에선가 태워 갔다.
초상화 작업은 앤디 워홀의 연소득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예술계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조차 그는 그 작업을 즐겼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말런 브랜도 같은 연예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1960년대 이후, 그는 자연스럽게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의 초상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일기에는 앤디 워홀의 초상화 작업 과정에 대한 내용은 상세히 적혀 있다. 초상화 작업은 (오로지) 폴라로이드 빅 샷 카메라로 예순 장의 사진을 찍고 그 후 잘 나온 네 장을 골라 실크 스크린 프린터에게 맡겼다. 알렉스 하인리히(나중에는 루퍼트 스미스)가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어 주면 앤디 워홀은 그중 하나의 이미지를 선택해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자르고 손질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리듯이 정성스럽게 제작한 이미지는 다시 아세테이트 필름에 네댓 배 확대한 다음 다시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앤디 워홀에게 있어서 파티는 그저 놀고먹기 위한 파티가 아니라 일의 일종이었다. 하룻밤에 파티 열여덟 군데를 도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파티를 즐겼던 워홀은 그만의 속어를 일기에 쓰기도 했는데, 밖에 나가기 전 세수를 하고 은발의 머리를 단정히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을 ‘풀칠’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있어서 파티장은 사람들과 연극, 영화, 그리고 책 등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고, 초상화 작업을 의뢰받고, TV드라마
<사랑의 유람선>
출연을 제의 받기도 하는, 한 마디로 사교계의 뜬소문과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지면서 가리지 않고 떠들던 공간이었다.
앤디 워홀 일기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인간 앤디 워홀과 그의 삶을 시간순으로 짚어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또한 팝아트의 기록이자, 당시 뉴욕에서 예술과 대중문화와 사회를 주도했던 사람들 모두의 일기이기도 하다. 출간 당시인 1989년, 이 두꺼운 책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네 달간 올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