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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그녀의 변화무쌍한 스타킹 디자인

2009-02-17

늘씬한 다리에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의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매주 수요일이면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카페에서 일하는 그는 수요일마다 카페를 찾아오는 그녀가 자꾸 신경 쓰이는데…. 수요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그녀의 변화무쌍한 스타일 디자인.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장소협찬 | 2ND FLOOR, 모델 | 이지원

한없이 나른하던 수요일 오후,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바람이 따라 들어온다. 보라, 저 늘씬한 다리를. 보라, 가늠하기 어려운 보랏빛으로 감싼 늘씬한 다리를. 발 끝부터 빨아들인 짙은 보라색 물감이 무릎을 지나며 눈부신 핑크 빛으로 반짝거린다. 물 속에 퍼지는 잉크처럼 내 눈동자 속에서 그녀의 보랏빛이 퍼져 나간다.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잡지를 훑어보던 그녀가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볼륨을 조금만, 높여주세요.’ 그녀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오디오의 볼륨을 높여줄 수 있다. 스피커 옆에서 다시 그녀를, 그녀의 다리를 훔쳐 본다. 스피커가 둥둥, 심장이 쿵쿵. 그녀의 다리를 휘감은 보라색을 만든 빨강과 파랑의 함량이 궁금해진다.

한 커플이 자그마치 세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 나갔다. 음악 소리로도 묻을 수 없었던 긴 수다에 진이 다 빠진다. 커플이 떠난 자리를 치우는데 카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선다. 지난주 수요일의 그녀가 또 온 것이다. 텅 빈 카페가 당황스러웠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검정색 부츠에 청록색 레이스 스타킹을 신고 있다. 짙은 청록색이 그녀의 다리를 만나 제 색깔을 잃은 듯 보인다. 기하학적인 패턴의 레이스 무늬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다리의 굴곡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패턴들이 섹시하다.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고 있는데 그녀가 들어온다. 서둘러 갈무리하고 공연히 행주로 바 위를 훔친다. 흘깃 바라본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카페 라떼를 주문하고 책을 읽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한다. 오늘은 오렌지색 우주선 무늬가 아기자기한 스타킹을 신고 있다. 우주선이 아니라 토성이나 금성 같은 별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빅뱅. 그녀의 다리 위에 또 하나의 우주가 만들어졌다. 모두 같아 보이지만 크기도 모양도 조금씩 다른 무늬들이 꼭 우주를 닮았다. 우주선이든 행성이든 아무래도 좋다. 이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그녀의 다리에 그려진 무늬들을 짚어가며 흥얼거리고 싶다. 그녀의 긴 다리에 수 놓인 별은 모두 몇 개 일까.

카페 구석에는 아까부터 닭살 커플이 뱀처럼 엉켜있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나이 지긋한 남자 손님이 카푸치노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고, 그 뒤로는 앳된 얼굴의 여자애들 둘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고 있다. 밀쳐두었던 책을 꺼내 보려는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오늘은 바로 내가 있는 바 쪽으로 걸어온다. 경쾌한 발걸음, 검정색 웨지 힐에 무릎 밑으로 한 뼘 정도 내려오는 레깅스를 신은 그녀가 내게로 온다. 200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별처럼 노란 도트 무늬가 점점이 박힌 레깅스를 신은 그녀, 유난히 활기차 보인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녀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밝은 홍조를 띠고 있다. 그녀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한다. 바에 기대 발을 까딱거리며 카페를 둘러보던 그녀에게 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민다. 계산을 하고 걸어나가는 그녀, 레깅스의 도트 무늬가 어느새 흰색으로 바뀌어 있다. 반전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뱀처럼 엉켜있던 커플이 다가와 계산서를 내민다.

그녀가 앉아있다. 조금 전 카페에 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하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밖과 대조적으로 카페 안은 마치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여름하늘처럼 밝고 화사하다. 비 갠 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견디지 못한 여린 나뭇잎이 흩날리는 것도 같다. 카페 안의 맑은 날씨는 모두 그녀, 아니 그녀의 스타킹 때문이다. 상체를 조금 숙이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리듬을 맞추는 그녀는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클럽이라도 가려는 걸까. 클럽의 조명을 받으면 한층 주목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분 좋은 그녀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면 카페 문을 닫고 퇴근해야 하는데 그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녀가 서 있다. 살구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 바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그녀가 여느 때처럼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커피를 내리며 그녀를 훔쳐 본다. 아마 밝은 핑크색이었을 스타킹이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살구색으로 바뀐 게 아닐까. 꽃잎의 즙을 짜 물감을 만든다면 제 색깔만 고집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과 조화를 이룰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한 무늬가 꼭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보인다. 지친 듯한 표정의 그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커피 한잔을 비운 그녀가 카페를 떠났다. 카페 문을 걸어 잠그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카페 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그녀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저 손짓이 기다리던 연인을 향한 것이면 좋겠다고, 아주 잠깐 생각한다. 그녀는 앉아있고 나는 서있으므로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리로 향한다. 회색 미니스커트에 짙은 보라색 스타킹. 스타킹은 초록색 비라도 맞은 것처럼 얼룩이 져 있다.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 잭슨 폴록. 지난주에 찾아왔던 그녀를 보고 떠올렸던 그림은 바로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었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동경하며 그와 같은 추상주의 그림을 그리다, 그녀의 그림에 강렬한 방점을 찍어줄 초록 물감을 스타킹 위에 흘리고, 예술적 감각이 넘치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런 무늬가 있는 것처럼 거리를 활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변변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한 그녀에게 다짜고짜 잭슨 폴록을 좋아하느냐고 물을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리로 돌아와 오디오의 볼륨을 조금 높이는 일 뿐이다.

이제 수요일 아침이면 그녀를 기다린다. 오늘은 몇 시쯤 올까, 그녀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남자친구는 있을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문 밖으로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가 비치더니 문이 열린다. 오! 그녀다. 오늘은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갈색 스타킹을 신었다. 나뭇결 무늬가 있는 스타킹에 굽 낮은 구두를 신고 경쾌하게 마룻바닥을 울리며 곧장 바로 걸어 온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 무늬가 아니라 물감 자국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잭슨 폴록을 좋아하는 것 같다. 때로는 과감한 잭슨, 또 어느 날은 얌전한 잭슨으로 자신을 꾸미는 거다. 의자에 살짝 걸터앉은 그녀가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들고 온 가방은 바닥에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잡지를 뒤적인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본다. 말을 걸어볼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녀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귤 두 개를 바 위에 올려 놓는다. “드세요, 제법 달아요.” 그녀가 생긋 웃는다. 하얗고 고른 치아가 눈부시다. 그녀가 건넨 귤 하나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기대감과 설렘이 교차한다. 줄 것이 없다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게 좋은데. 수요일 다음엔 목요일이 오지만 기대 다음엔 실망뿐이니까.


| 김성훈은 스타킹을 직접 만들고 디자인하는 스타킹디자이너다. 검은색, 커피색 일색인 스타킹에 톡톡 튀는 컬러를 불어 넣으며 뭇 여성들의 다리를 디자인하고 있다. www.dn-b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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