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7
왜 예술가들은 다들 배를 곯아야만 하고, 인상을 우그려야 하고, 고독에 절어 살면서 줄담배를 피우며 괴로워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개인의 성격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일이 고되고 힘들긴 하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예술 아니라 무얼 하더라도 언젠가는 인상을 우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예술가라는 직업이 좀 더 자신을 심도 깊게 돌아보게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 쳐도 사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란 것은 예술가만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성현이 고서에서 이르는 삶의 방식이니, 곧 올바른 처세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행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지낼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밝게 살아가면 그림이 밝아진다는 사실은 많은 예술가들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 여기 그렇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타인의 모범이 될 지도 모를만한 예술가를 한 명 얘기해 보겠다. 일생을 통틀어 한 번도 고생해 보지 않은 예술가. 살아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고, 부부간의 금슬도 괜찮았던 예술계 최강의 행운아. 믿겨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지 한번 직접 물어보도록 하자.
암스테르담에 고독한 천재 렘브란트(1606-1669)가 살았다면, 안트워프(안트베르펜)에는 자타공인의 천재, 페터 파울 루벤스(1577-1640)가 살았다. 학창 시절 그림 좀 그린다는 명성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대개 학교를 주름잡는 불량학생들마저도 웬만하면 그들은 간섭하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서 존중 받기 때문인데, 이 루벤스도 그런 케이스였다.
명성이 높은 화가는 교황도, 군주도 손을 댈 수 없는 일종의 '살아가는 세계가 다른 존재'로 공인되었다. 그들의 웬만한 간청은 들어주는 것이 당시, 군주의 배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넉살 좋은 달변가이자 해박한 지식의 사나이가 조국에 충성을 바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길은 바로 외교관이었던 거다.
외교관으로 잉글랜드의 궁정을 방문한 루벤스가 경치에 탄복한 나머지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영국 귀족이 말했다.
- 외교관께서는 화가처럼 그림도 즐길 줄 아시는군요.
그러자 루벤스가 말했다.
- 그게 아니라, 화가도 가끔 외교를 즐기는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역할과 관심사항이 모호하여 그냥 천재라고만 불리우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루벤스는 이렇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여 그것을 최대한 이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화가로서의 재능만큼이나, 주어진 입지를 이용할 줄 아는 마케팅의 천재였다. 자. 루벤스의 쾌도난마 앞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대 프랑스 왕국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는 이름에서 딱 알 수 있다시피 이탈리아의 명가 메디치가의 여자로서 왕가에 시집온 여자다. 하지만 베네치아 최대의 명가로서 군림하던 메디치가라 해도 그 근본은 결국 돈벼락 맞은 졸부에 불과했고, 가문의 영광을 수놓았던 메디치 출신의 교황들이 줄줄이 섰다 해도 결국 교황위라는 것이 혈통으로 승계되는 시스템이 아니다 보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결국 혈통을 최고로 치는 왕가 앞에서는 한계를 노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배경이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당대 유럽에서 한창 날리기 시작하던 부르봉 왕가 앞에서는 아무리 돈 많은 부자가문이라도 전혀 끗발이 서지 않는 노릇. 때문에 남편 앙리 4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녀는 기약없는 버로우를 탈 수 밖에 없었는데, 루이13세를 낳은 후 남편이 죽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린 태양왕을 무릎에 앉힌 마리 드 메디치는 섭정으로서 프랑스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른바 무슨 일이건 간에 운동이 있으면 반동이 따르는 것이 세상의 법칙.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이탈리아 졸부의 딸 주제에 섭정여왕에 등극한 마리 드 메디치로서는 일단 타이틀 방어전을 치러야 할 입장에 서게 되자 어떠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섭정을 '일개 졸부의 딸이 벌이는 정치놀이' 어쩌고 하며 비난하려는 프랑스의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시킬 일종의 '운명론'이었다.
죽은 왕과 자신의 운명적인 결혼, 신의 이름으로 맺어진 결혼서약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그녀로서는 그냥 장대한 스케일의 그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엄성을 폭출시켜 상대방을 압도시켜 버림으로 상황을 수긍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예술이 필요했었고, 이를 위하여 예술가와 연금술사, 마법사들을 우대하면서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도 이때 하마터면 마법사로 몰려 화형당할 뻔 했지만 마리 드 메디치의 치마폭에 숨어 화를 면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다급한 입장의 그녀가 목이 빠지도록 찾아헤메던 그런 예술을 하는 화가가 백마를 타고 등장했으니 그 인물이 바로 플랑드르의 아트 마스터 페터 파울 루벤스였다.
마침 거장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등받이가 필요했던 루벤스로서는 이를 거절할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복잡한 유럽 정계 속에 집어 던졌고, 프로파간다의 기수. 즉 정권 광고의 촉매제로서 역할을 받아들여 아주 즐겁게 수행했는데 이 당시 그린 것이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24 연작'이었다.
가톨릭의 신을 끌어들이기에는 아무래도 리슐리외 추기경(삼총사의 그 악당 추기경)이 껄끄러웠던 그녀였지만 루벤스에겐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정당성을 위해 써먹을 신들은 널리고 깔렸으니 사방에 굴러 다니는 게 신들이었다. 광고주를 위해 루벤스는 특별히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일당을 우루루 끌어들였고, 이 장엄한 어용 예술은 중세 유럽의 복잡하고도 짜증나는 정치적 명분론을 '신의 이름으로 정해진 운명론' 한 방으로 끝장내 버렸다.
그리스의 신들로부터 앙리4세의 부인이 될 것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여인, 마리 드 메디치의 운명을 묘사했다. 제우스와 헤라 아래로 운명의 세 여신이 보이는데, 이는 그녀의 아들인 태양왕 루이13세가 부르짖었던 왕권신수설. 즉 신이 정해준 왕의 운명론에 대한 정신적 토양이 되었던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왕권신수설은 사실 이렇게 부르봉 왕가에만 전해진 비전이 아니다. 전제군주들의 사회를 휩쓸었던 열병이 되어 도버 해협 건너의 잉글랜드 국왕 찰스1세에게까지 전파되었다. 루벤스가 잉글랜드를 방문하기 전만 해도 의회파와 청교도들에게 눈에 띄이는 탄압을 가하지 않았던 찰스1세였지만 루벤스를 만나 보수동맹을 체결한 후 갑자기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홰까닥 돌아버렸고, 결국 의회파의 권리청원을 무시하다가 한 방에 훅 가버리고 말았다.
어린 앙리4세와 마리 드 메디치. 꼬마 둘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엑스트라의 면면을 보라.
시집을 가기 위해 마르세이유 항구로 입성한 프랑스의 여왕 메디치.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빵빠레가 요란하다. 하늘에선 천사가, 땅에서는 당시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육덕스러운 여인들을 비롯한 군상들이 지극히 바로크적인 몸짓으로 오도방정을 떨고 있다. 지금 보면 온 몸이 가려워 미칠것같은 오바질의 파도지만 당시엔 이게 최신 유행으로, 귀부인들은 거대한 스케일의 넘치는 패기에 압도되어 이마에 손을 짚으며 껌뻑 넘어가 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게다가 그 일의 중간에 또다른 사건이 꼽사리로 발생했다. 이 연작이 끝나기 전의 시절인 1620년대 무렵. 에스파니아의 펠리페4세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 세력과 잉글랜드의 찰스1세가 이끄는 성공회의 터프가이들은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보수 세력의 결집으로 진보세력이었던 신교도들을 박살내고 싶었던 가톨릭 계열의 에스파니아와 플랑드르로서는 정확히 말하면 신교도도 아닌 주제에 신교도를 지지(?)하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1세를 어떻게든 구워삶아 두어야 했는데, 이때 외교사절로 뽑힌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벤스다.
그는 1627년부터 1630년까지 에스파니아와 잉글랜드의 왕궁을 번갈아 오락가락하며 열심히 활약하였고,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인맥을 넓혀 나갔다. 당시 유럽의 상류층에게는 예술가와 장사꾼을 가까이 대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프랑스의 국모 마리 드 메디치와 로마 가톨릭 세력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는 이 달변의 거장은 이미 '그림 쫌 그려봤다 소리를 듣는 일개 아티스트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행동의 자유와 그럴싸한 위신을 가지기 위해 이미 에스파니아 국왕의 기사작위까지 받아 챙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드 메디치와 에스파니아 국왕, 그리고 플랑드르는 가톨릭 계열의 진영이었으니 그 정도는 완전 짜고 친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작위 하나에 껌뻑 죽어주는 유럽의 분위기에서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그는 에스파니아의 왕궁에 머무르는 동안 이베리아 반도 최강의 예술가라는 칭호를 가졌던 에스파니아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친구를 먹고 스페인의 예술에 대해 공부했으며, 기어코 양국의 화해를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629년 켐브리지 대학의 아트 마스터의 호칭을 받았다.
바로 그 이듬해 찰스 1세로부터 잉글랜드의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는데, 이때 구워삶아지면서 시작되었던 찰스1세의 로마가톨릭 우대정책은 결국 국왕파와 의회파/청교도의 충돌로 이어졌고, 주워들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잉글랜드 불쌍한 국왕 찰스1세의 사형집행까지 비화되었다.
그러니 알고 보면 루벤스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사고뭉치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