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20
박재환 님 외 여러 저자가 공저한
<술의 사회학>
이라는 책은 술과 음주를 통해 형성되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문화를 사회학적 시각으로 분석해 놓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술의 기능을 부정적.소비적 기능으로 명쾌하게 해석한 인문학적 관심이 돋보이는 교양서입니다.
SBS의 모 PD는 아침 프로그램에서 한동안
<자장면의 사회학>
을 거론하며 자장면에 대한 색다른 시각과 자장면의 의미를 사회학적으로 재해석해 대단히 흥미로운 리포트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캐릭터를 연구하는 많은 개발자들과 기획자들에게도
<캐릭터의 사회학>
에 대한 연구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질과 양이 함께 비례적으로 성숙해 가지 않으면 버블 현상을 낳게 마련입니다.
대중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좋은 캐릭터를 양산 해 내는 건 개발자들의 몫이요,
좋은 컨텐츠 로써 캐릭터 개발의 질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건 각계 각층,
그리고 캐릭터를 소비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리 간과할 만한 일은 아닐 겁니다.
캐릭터는 곧 문화이고 문화는 어느 특정 계층에 의해서만 조직 형성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되새겨 보면 우리에겐 과연 캐릭터를 문화로 인식, 수용하고 즐기는데 충분한 판단력과 준비가 되어있는지 성찰해 보게 됩니다. 경제적인 가치만으로 캐릭터의 가능성을 묶어두는 것이 안일한 자세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캐릭터는 자본을 창출하고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지금도 많은 캐릭터를 생산하고 또 소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측면으로만 캐릭터를 인식하는 태도는 그만큼 캐릭터 시장을 다양한 패러다임으로 확장 시키지 못하고 one-source만 있고 multi-use는 없는 기형적인 산업을 팽창 시키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사회학>
에 대해 파고든다면 그 자체로써 꽤나 거창해 보이고 고리타분해 보입니다.
필자 역시 전문적으로 그 방면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쯤은 미약하게 나마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화두를 던져 놓고 고민해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리포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캐릭터를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사고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사실 캐릭터라는 사전적 의미는 영어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저나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캐릭터를 그대로 직역하면 성격, 또는 독특한 개성과 이미지가 부여된 존재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익히 접해왔던 캐릭터들을 한번 투영시켜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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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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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마로, 뿌까, 우비소년, 콩콩이, 블루 베어 등등…
국내에서 개발된 캐릭터들만 열거해 봐도 이제 우리나라도 양적으로는 그 어떤 캐릭터 개발 선진국에 한참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캐릭터에 대한 문화적 욕구가 해외 의존도를 벗어나면서 가능해 졌습니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인프라 구축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욕구는 봇물 터지듯 팽창해 왔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영화, 드라마, 광고, 문학 등 다양한 문화적 매체가 급격하게 산업적 확장을 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아기공룡 둘리는 80년대 출판 만화에 뿌리를 두고 숱한 사회적 파장에 비껴 서지 않고 그 핵심에
참여하며 지금껏 성장해 왔습니다.
둘리는 생물학적 동물 유전자를 지녔음에도 초능력을 발휘하고, 집주인을 애완동물 처럼 여기며 마이콜, 도우너 등 친구들까지 주인의 집에 끌어들여 대 소동을 벌이곤 합니다. 집주인 고길동은 80년대 독재정권의 표상이었고, 고길동을 유린하는 둘리의 말과 행동은 곧 부패한 정권에 일침을 가하는 동 시대 모든 사람의 억압된 울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둘리의 일거수 일투족은 카타르시스가 되었고, 독재정권에 맞서는 당당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태 필자 역시 아기공룡 둘리는 격변의 80년대를 대변한 우회적 판타지였음을 칭송합니다.
마징가 제트의 출현에 로보트 태권 브이가 일본에 대응하는 국가적 자존심의 발로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억지 추측을 해본다면, 아기공룡 둘리는 초능력 하나로 암울한 80년대에 대응하기 위해 태어난 반 정치적 성향의 뚜렷한 캐릭터 성을 띄고 태어났다는 해석도 억지만은 아닐 듯 싶습니다. 굴욕적이고 억압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아기공룡 둘리 같은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숨통을 트일 수 있었다는 건 둘리가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였다는 점입니다.
이를 반증하듯, 영화나 드라마 가요처럼 직설화법이 정부의 심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때,
작가는 2003년에서야 인터뷰를 통해
<암울햇던 80년대 정부의 심의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거란 생각에 동물을 의인화 한 둘리를 만들어 냈다>
고 고백했습니다.
21세기를 맞아 둘리가 국내 캐릭터 산업의 선두주자로 떠오르면서 일부에서는 디자인 측면에서 계절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둘리의 녹색 칼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둘리가 80년대를 통렬히 비판했던 것처럼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희동이>
<마이콜>
<도우너>
등 캐릭터성이 뚜렷하고 개성있는 조연들까지 히트하며 해외시장을 누비는 국내 캐릭터 산업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피력하려 했던 사회적 주제 의식이 시대를 관통하며 뚜렷한 포맷으로 일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우너>
마이콜>
희동이>
암울햇던>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이 80년대의 암울하고 부패한 정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맥 한번 못추고 쓰러져 갔지만 격변의 80년대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과 김광림 극본의
<날 보러 와요>
을 통해 대중매체의 대표격인 영화와 연극으로도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70년대 이후에 출생한 대부분의 사람들 기억 속엔, 그것은 그저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면에 드리워진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2000년대가 되서야 겨우 엔터테이먼트로 간접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소재의 역사적인 비극성으로 인해 일부 시각에서는 영화의 완성도를 놓고 비판의 여론도 더러 있지만, 그 시대를 뼛속 깊숙히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영화만큼 그 시대상을 부드럽게 혹은 격렬하게 흡수 시키는 장치도 그리 흔치는 않을 듯 싶습니다.
잔혹한 연쇄 살인을 추억하고, 날 보러 오라는 식의 범인을 향한 우회적 통첩은 그만큼 달라진 시대사의 변형을 간접 증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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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화성>
한동안 엽기코드로 인해 국내 캐릭터 시스템은 심한 몸살을 앓았습니다.
플래시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가 붐이 되었고, 코믹과 엽기 컨셉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 비쥬얼과 제작 툴의 화려한 기술 배양에 한동안 우리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미 격변의 80년대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시각의 다양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요?
획일적인 기획 라인과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안일 주의는 7-80년대 아니 그보다 더 앞선 시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고질적인 폐단인 것만 같아 아쉽습니다. 이는 곧 사회를 관조하고 역사를 조력해야 하는 작가들의 마인드에도 적잖은 타격을 입힙니다.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은 특별히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든 쉽게 사장되거나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은 것임을 반증합니다.
캐릭터는 문화를 투영하고 문화는 사회와 시대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캐릭터의 사회학>
은 좀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한번쯤은 우리가 다각적으로 이에 관한 패러다임을 연구해 볼만 한 매력 있는 화두 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럼 다음 칼럼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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