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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노상 건축물에 담긴 권력의 도시론

2004-05-03

도시라는 정의는 “일정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핵을 가지는 인구의 집중지역”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가진다.
도시라는 공간은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국가의 의미로 불리워졌고, 중세 유럽에서 길드적인 산업기반을 두고 성장한 자유도시의 의미로, 근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축적과 부흥으로 성장한 사회생활의 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듯 우리가 사는 도시는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있고 일상의 공간이 융합되어진 곳이다.
그러나, 도시라는 의미를 단지 사전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상식적 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종교적, 때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구성되어졌고, 그 속에 근대적 도시라는 의미는 ‘힘의 논리’ 즉, 권력의 질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간과하지 못할 사실이다.
이런 의미로서의 도시 속의 권력, 도시의 이미지는 규정과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법으로서 형태 지워진다. 그리고 최종적인 법의 정의는 강한 자에 논리에 의하여 정의되고 또한 강한 자의 논리에 의하여 정의(定義)라는 정당성을 확보 하고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이렇듯 도시라는 이미지는 인간의 힘의 논리와 보이지 않는 힘의 논리가 경쟁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장소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도시는 분업화, 전문화라는 의미로 대변 될 수 있다.
이 분업화 및 전문화는 건축, 토목이라는 커다란 의미에서 도시 시설을 분리 하고 때로는 건축계획, 도식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했다. 이것은 대학에서부터 행정기관까지 분업화 및 전문화라는 분류법으로 이름 지워지고 있다.
근대 이후, 도시의 문제점은 다양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분류법과 영역으로 구분 지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세분화된 부분만을 생각하는 악순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분업화가 역설적으로 작용하여 변형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토목구조물과 건축의 혼용 원칙은 각 부분의 요소를 활용한 사례로서 필요는 충족되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각 기능의 혼용은 관계없는 요소가 접속되어 건축으로는 보기 힘든 모습의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이전의 동경과는 다른 새로운 동경의 가로(街路)를 만들어 내고, 이러한 모습은 환경유니트로 대변되는 집합의 형태로 도시의 환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도시 속의 환경 유니트는 길다, 크다라는 크기의 문제를 넘어, 접속되어지는 환경의 도형적인 대응관계를 이용하여 서로서로의 기능을 살리고 사용자에게는 이용할 가치가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경의 지도를 한번 천천히 들여다 보면 공백이라는 것을 보기에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런 꽉 차 있는 도시의 공간을 접하는 당사자에게는 “공백을 보면 참기 힘들어 하는 건가?” 혹은, 도시의 여백을 “아깝다”라고 생각하는 공백공포증후군(空白恐怖症候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여백을 동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공백공포증후군으로 인해 기능의 관련성보다는 단지 공간의 크기만으로 도시의 공백을 채워나가고 하나의 군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공백공포증후군은 크기만으로 각 도시시설을 묶어내어, 도시의 역사, 사회의 코드를 넘어서, 당돌하고, 즉물적으로 사물과 사물을 인접시킨다. 그리고, 공백을 사용하려고 하는 욕망 속에 상상력과 지혜라는 이름으로 사물을 연결시켜 사용자를 새로운 사용자로 태어나게 한다.

동경에서는 끊임없이 도시와 거리 속에 동일한 크기의 요소를 찾아 당사자와 상의 없이 공백을 매워 버린다.
결국, 동경이라는 도시 속의 욕망은 어떻게 하면 공백을 방치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까 탐구하는 도시 생활자의 욕망과 센스의 발동일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학문을 과학(科學)이라는 이름으로 정의 했다.
때문에 일본에서의 과학의 의미는 “분리되고 정의된 학문”이라는 서양의 학문이다. 이러한 일본학자들의 정의를 쫓아 우리도 동일한 개념에서 “과학”이라 부르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정의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과학은 19세기 이후의 새로운 신앙이며 미신일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 해보면, 자연환경, 돌연변이, 멸종되어 가는 동식물들과 식물상과 동물상을 포함한 무한히 성장하고 변화하는 사물들을 우리는 정의하고 분리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즉, 우리의 문명에서 이야기하는 도시의 문명은 제품, 기구, 건물의 변화와 형성이 빠른 리듬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의 빠른 증폭에 비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빠른 느낌을 주지 않고, 또한 인간의 생활 속에 사물로서 대변될 수 있는 장치인 공간은 인간의 욕망에 의하여 조정되어지고 체계화 되어진다.
결국, 문명의 진보, 삶의 질의 향상으로 대변되는 사물의 체계화, 공간의 질서 지움은 각개인의 취향과 생활의 질을 반영하며, 당시대의 정체성까지 반영한다.

다른 각국의 도시와 비교하면 동경에서 특징적인 모습은 자동판매기와 같은 크기의 사물이 산재 한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자동판매기이겠지만, 다른 해외의 도시에 비해 동경의 자동판매기는 그 다양함과 숫자에 있어 비교가 되니 않는 수준이다. 동경의 자동판매기는 도시의 치안이라는 문제로부터 태어난 부산물이지만, 다른 측면을 보면 도시의 스케일에서도 당연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즉, 무수한 도시의 틈을 어떻게 사용할까라는 동경특유의 생각으로부터 동경특유의 사이즈인 VENDING MACHINE SIZE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동경의 거리에 넘쳐 나는 극소(極小)의 공간은 도시와 신체의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도시환경을 만들어 내니 일반적인 도구로서 이용되어지고 이 극소공간의 이용으로 도시생활자의 생활은 변화 하여 나아간다.

동경의 순수한 모습을 체험 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도시의 고속도로를 달려보라고 추천한다.
동경 속에 쭉 뻗어있는 도시고속도로는 동경올림픽 때 급조되었던 공원, 강등의 배치를 중심으로 고속도로라는 교통망으로 연결시킨 것이큰 특징이다.
동경 도시 고속도로는 롤러코스터라고 불리 울 정도로 긴박하고 복잡하다. 그 속에 건물 군과 도시 기반시설은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고 단지, 물류를 이동시키는 목적에 부합하는 효율성에먼 기반을 두고 성장해 나아가고 있다.

교통시설과 연결된 건물은 디자인적으로 독립된 모뉴멘트를 가진 건물로는 완성되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특히 동경의 경우를 살펴보면, 도시 각지에 산재해 있는 기반 시설을 고속도로라는 교통망으로 연결하여 묶어낸 물류도시의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이야기와 같이 ‘모든 물류는 동경을 통한다’라는 일본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그만큼 동경의 물류기반 시설과 이동량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면서, 도시 생활자의 공간을 가로 지르며 흘러가고 있다.

jean baudrillard의 “le systéme des objets”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약 가구가 팔린다면, 그것들이 값싸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이 그것을 인정하고 부르주아지들이 그것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생략… 개인과 가정,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변화함과 동시에 물건의 스타일도 변화한다. 이러한 물건의 동산들은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이동과 편의를 위해 공간의 부족으로 인한 불가피한 적응의 결과이다.”라고 사물의 생산을 정의한다.

이것은 많은 경우 발명이라는 부족함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의 결과이며 이런 현대적인 모습은 우선 스타일의 부재라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공간의 부재라는 모습으로, 결국 과거의 불행의 해결이라는 미봉책으로 결말을 이루게 된다.
공간의 부재로 인한 삶의 공간은 자신의 구조를 상실하여 구조가 다시 형성되지 않는 일련의 현대적인 조화가 일어 난다.
이 일련의 현대적인 조화는 예전의 상징적이고 관습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힘을 보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모습과 현대적인 단절 사이에는 진보라는 어떠한 힘이 작용한다.
결국, 이 과거와 현대라는 단절 속의 진보는 사물의 새로운 기능, 가능성, 다기능성 속에 개인은 사회관계 안에서 매우 자유롭게 자신을 처분할 수 있는 새롭고, 자유로운 구조는 발견한다.이것은 전체적인 해방이 아니라 리베라시옹(lideration;독립)이 아닌, 에망시옹(émanc-ioation;해방)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자체의 해방이 아닌 사물의 기능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자체 안에서 해방되고, 해방되면서 인간내면의 무언가를 해방한-혹은 해방되면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해방한)것이 사물의 기능이다.
오늘날 결국, 사물들은 그 자체가 소용되는 것 속에 분명하게 들어 나보인다. 따라서 사물들은 기능적 사물의 범위 내에서 자유롭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기능하고 실제로 기능만을 지닐 뿐이다. 그러나 사물이 자기기능 속에서만 해방되는 한 인간은 이사물의 사용자로서만 해방된다.
사물자체가 그 자체로서 만의 기능으로 사용된다면 사물자체의 관계란 없을 것이다.
즉, 공간은 새로운 구조 속에 사물들의 상관관계와 사물들의 기능의 초월 속에 열려지고, 생겨나고, 확대되기 때문이다.
공간은 사물의 실제적인 자유이고, 사물의 기능은 사물의 형식적인 자유 일뿐이다.
기능적인 환경은 보다 열려 있고 자유롭지만, 자신의 다양한 기능 속에 기능에 의한 구조는 상실되고 세분화 되며, 결국, 통합된 심리학적인 공간과 세분된 기능적 공간 사이의 중간 휴지(休止)를 통해서 일련의 사물들은 서로를 증명하면서 작용을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을 바라보는 입장 속에는 유명건축가의 작품으로 동경의 건축 또는, 일본의 건축을 이야기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 일본을 대표한다고 부를 수 있겠지만,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동경주변부의 건축이 현실적인 일본의 건축, 그리고 동경의 건축을 이해 하기에 더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경이라는 도시는 80년 이후의 카오스긍정(肯定論), 동경론을 배경으로 도시의 혼란과 풍경을 은유적으로 건축 작품에 반영한 건축가의 작품이 경쟁적으로 발표되었고, 이런 건축가에 의한 동경론의 많은 제안이 쏟아져 나왔지만 낙관적인 이미지의 건축 관은 생산하지 못했다.
그리고 표층적인 건축 양식 및 혼재의 표현으로 전근대와 초 근대라는 의미의 대립만을 말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과연 우리가 논하는 도시론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생산하는 대안만으로 그치지 않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와 현실적인 복잡함을 내재한 동경주변부의 건축이 예술과, 학문에서 건축으로 부르기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동경이라는 도시는 지금도 성장해 나아가고 변화해 나아가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의 모습은 완벽한 미의 예술이 아닌 불안정하고, 불특정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삶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시각으로부터, 우리의 도시를 바라 보아야 하고, 부정적인 시각, 즉, 어떤 고정된 모습의 도시를 갈망하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삶의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도시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집합에서 도시가 이해되어진다면 이 불안정한 도시의 모습은, 완벽의 상위개념(上位槪念)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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