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5
서촌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스마트폰과 사진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새로 생긴 예쁜 가게를 기웃거리고 사진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사람들의 관심은 새로 생긴 가게들에 쏠려 있지만 서촌의 동네문화를 기록한 책
<서촌방향>
의 저자 설재우 작가는 작은 골목길과 오래된 건물들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긴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오래된 오락실 자리에 ‘옥인상점’을 만들어 사람들과 서촌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설재우 작가는 서촌의 숨겨진 매력을 들려준다.
글│한정현 기자
사진│최영락 기자
기사제공│팝사인
서촌방향>
추억의 놀이터 ‘용 오락실’ 자리에 만든 ‘옥인상점’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이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변화의 양상은 저마다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급격하게 변해 왔다. 세상의 시계 바늘 속도에 의해 떠밀려 변하기도 했고, 세상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스스로가 변화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기도 했다.
서촌의 동네 문화를 기록한
<서촌방향>
의 설재우 작가는 서촌 역시 과거에 비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서촌 역시 조금씩 꾸준히 변화해 왔는데, 요즘 들어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촌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청운효자동,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다. 설재우 작가는 서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30년을 서촌에서 살아왔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 ‘옥인상점’ 자리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용 오락실’이 있던 자리다.
서촌의 마지막 동네 오락실로 명맥을 이어가던 용 오락실은 2011년 봄의 끝자락과 함께 사라지게 됐다. 당초 카페가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설재우 작가가 나서 그 자리에 ‘옥인상점’을 열었다. ‘옥인상점’은 설재우 작가가 서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서초공작소’의 셀렉트 샵이기도 하고 작품전시, 서촌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다. 용 오락실에 작가의 공간을 만든 것은 이곳이 개인적 추억이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던 동네 오락실은 사라져 가는 동네문화를 상징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라진 용 오락실 자리에 서촌을 알리는 복합문화 공간을 만들어 서촌의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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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과 가게가 어우러진 동네 상권이 서촌의 경쟁력
도시는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지속적인 탄생과 소멸 속에서 유지된다. 새로운 가게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 역시 도시의 생명이 유지되는 순환의 과정이다. 그런데 소위 뜨고 있는 ‘핫 플레이스’들은 자본의 진출에 기인한 기형적인 변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서촌이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서촌도 북촌이나 삼청돈, 가로수길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 설재우 작가는 “다행스런 것은 서촌은 상가 의존도가 높지 않아 대형자본이 관심을 가질만한 메리트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동네를 지키는 토박이들의 비율이 높아 북촌처럼 투자 개념의 가게들이 진출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고 설명했다.
설 작가는 “이 곳에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 서촌에 터를 잡고 있는 실거주자이자 본업인 생계형 가게들이다”고 말했다.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서로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동네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서촌의 매력이자 동네를 거대자본의 유입으로부터 동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경쟁력이 되고 있다.
설재우 작가, “서촌은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곳”
‘핫 플레이스’로 서촌이 세관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설 작가의 시선은 세간의 관심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새로 생신 예쁜 카페와 맛집 탓에 새로 생긴 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서촌이라는 지명의 연원을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서촌은 오래된 지역이다.
서울에서도 가장 오래된 삶의 흔적이 있는 동네이기에 서촌에는 숨어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설재우 작가가 서촌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의 경쟁력을 발견한 것도 바로 서촌의 오랜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설 작가는 서촌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매력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발품을 팔아 서초의 역사를 기록하고 책으로 엮어 서촌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책
<서촌방향>
을 읽고 서초의 매력에 빠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서촌답사가 서촌공정답사라는 이름으로 매주 주말에 개인과 단체를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촌공정답사는 경복궁에서 인왕산에 이르는 서촌 지역 곳곳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소외받고 있는 서촌의 중요한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서촌공정답사는 대중이 서촌에서 보고 싶어 하는 트렌디한 곳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행에 밀려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든 작은 골목길, 역사 속으로만 묻히는 문화유산들을 찾아내 사람들과 함께 먼지를 털어내고 가치를 발견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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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옥인상점’, 진화하는 ‘서촌 프로젝트’
설재우 작가가 운영하는 ‘옥인상점’에는 간판이 없다. 시트지로 창문에 붙인 가게명이 옥인상점을 알리는 유일한 사이니지다. 그리고 서촌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서촌공작소’라는 작은 문패만 있을 뿐이다.
설재우 작가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어서 간판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간판으로 공간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서로 공유하면서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 옥인상점과 서촌공장소에는 다양한 유형의 상품과 무형의 가치들이 혼재되고 있어 공간의 성격을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옛날 서체를 사용한 오래된 간판을 좋아한다”는 설 작가는 요즘 간판의 트렌드는 정체성을 느낄 수 없어 혼란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역 스토리텔러로서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설재우 작가는 현재 서촌방향 2편을 집필 중이다. 서촌 역시 다른 동네들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흐름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변화를 기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설 작가의 서촌 기록은 계속된다.
“서촌방향에 소개된 가게 중 현재 절반 정도가 사라졌지만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 작가는 “사실상 자본을 막을 방법은 없고, 개인의 노력으로 동네 문화가 보존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오늘을 기록하는 스토리텔링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