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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환갑 전에 내 책 10권 내는 것이 목표요!

2012-05-17


어느 도시에나 헌책방이 모인 곳이 있을 텐데, 서울에서는 청계천 고가(지금은 사라졌지만) 아래 헌책방 거리가 그런 곳이다. 청계5가부터 동대문운동장을 지나 황학동까지 이어진 헌책방은 셀 수도 없었다. 내가 이곳을 출입하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인 듯하다. 주로 참고서를 구입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을 일부러 찾았다. 하지만 왜 참고서를 사러 굳이 청계천까지 갔는지는 경험 있으신 독자는 눈치 챘을 것이다.

글│이상엽 이미지프레스 대표
기사제공│월간사진

내용 ★★★★
편집 ★★★☆
디자인 ★★★☆
인쇄 ★★★☆
제본 ★★☆☆
(★★★★ 만점)

그곳에 가면 새것 같은 헌책들이 절반 이하로 팔리고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참고서 구입비로 받은 돈의 절반을 남길 수 있었다. 학기마다 돌아오는 용돈 만들기 행사였다. 이렇게 용돈 만들기를 위해 찾던 청계천 헌책방가는 어느덧 내게 가장 흥미롭고 마음편한 문화골목이 되고 있었다. 당시 학교도서관은 수장된 책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툭하면 문이 잠겨 있었다. 하지만 청계천은 그야말로 개가식 서고를 갖춘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나의 헌책방 순례는 대학에 가서도 이어졌다. 학생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 맞서 전두환정권은 ‘헌법수호’를 내걸고 독재를 연장하려하던 때였다. 나는 속칭 운동권 학생이었고 ‘학습’에 필요한 책을 싸게 구입하기 위해 청계천을 배회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평생 처음으로 호화롭게 양장된 사진집을 한권 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책방주인들은 사진집은 매우 소중하게 보관했고 가격도 비쌌다. 책값을 흥정할 때도 이런 책들은 할인율이 낮았다. 내가 그 때 손에 넣은 책은 이란 사진집이었다. 사진가 릭 스몰란이 기획한 시리즈 사진집으로 한 나라를 선택해 전세계 사진가들을 불러 모아 하루 동안 그 나라를 기록하는 이벤트성 기획이었다. 이 시리즈의 일본편은 1985년에 행사가 있었고 내 손에 사진집이 들어온 것이 86년이니 꽤 따끈따끈한 헌책인 셈이었다. 당시로서는 사진 전공자도 아니었고 세계적인 사진가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시절이라 그냥 “야 사진 좋다”로 넘어갔지만, 이 책에는 당대 최고의 매그넘 멤버들을 비롯해 제임스 나츄웨이 등 최고의 사진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분명 한국이름이 분명한 사진가 한사람이 4쪽에 걸쳐 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은 한 사진가에게 1~2쪽 정도 할애하고 있던 이 책의 편집상 신기한 일이었다. 이 사진가가 누굴까? 그 사진가의 이름은 구본창이었고, 그는 오늘날 한국 최고의 사진가가 되었다.

책에 미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사진기를 잡아 지금까지 16년 동안 다큐멘터리사진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가끔 전시회라는 것에 참여하기도 하고 개인전도 열어봤지만 내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은 언제나 인쇄매체였다.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최근에는 일간지까지 다양한 형태의 인쇄물을 통해 독자들을 만난다. 하지만 어떤 시기부터 인쇄매체에 사진을 싣고 그 대가인 원고료를 받아서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 닥쳐왔다. 그래서 2000년 초반부터 책에 관심을 가졌다. 어사인먼트를 받을 필요도 없고, 내 생각을 편집자에게 맞출 필요도 없는 작가로서의 새로운 삶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6년 동안 11권의 책을 쓰거나 기획했다. 어떤 책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예술부분 베스트셀러에 올라 8쇄 이상을 찍기도 했지만, 어떤 책은 수년째 초판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책 집필에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수입이 나아졌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신문잡지 매체에 사진을 싣는 것과 책을 만들어 세상에 상재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그래서 어느 사이 “그래 사진가의 미래는 책에 있다”고 믿었고, 사진판 어딘가에 있을 책에 미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 사람들은 열번의 개인전보다 한권의 작품집의 힘이 더 쎄다고 믿는 사진가일 수도 있고, 독자가 찾아주건 말건 이론서가 튼튼해야 사진판이 발전하다고 믿는 평론가일 수 있고, 이미 잊혀진 이름모를 사진가의 작품집을 찾아 헌책방을 배회하며 수천권의 사진집을 모은 책 컬렉터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를 이번 월간사진 연재의 첫 번째로 할까를 고민하다가, 환갑 전에 작품집 10권을 내고 말겠다는 사진가를 만나기 위해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로 내려갔다. 마침 그곳에서 그의 4번째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박하선이다.

운주사의 밤

운주사 경내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그의 신작 사진집의 이름처럼 ‘천불천탑’ 안에서 이루어지는 출판기념회는 자체가 매력적이다. 다큐멘터리사진가로 활동하는 국수용을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함께 광주로 내려갈 참이다. 예나 지금이나 광주행은 버스가 편하다. 박하선처럼 국수용 역시 광주사람이다. 광주사람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이 지역 사내들에게서는 뭔가 강인한 것이 느껴진다. 우리 두 사람은 사진가 박하선과의 인연을 추억하며 광주를 거쳐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화순 운주사로 갔다.

입구에서부터 시원하게 펼쳐진 운주사 석탑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석불과 석탑들을 보호한다며 흉물스런 철제 펜스를 설치해 놓았는데 지금은 없다. 마치 큰 정원을 걷는 느낌으로 경내를 정비했다. 아! 이런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한다?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복잡거리는 서울 시내 갤러리에서 출판기념회를 해본 나로서는 언뜻 곧 있을 행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탑을 비추는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운주사 주지스님이 와인 정도는 용서했단다. 떡과 같은 간단한 주전부리와 녹차가 아름다운 다기와 함께 제공됐다.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박하선의 10년 작업이라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사진들이 슬라이드쇼로 빛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가의 인사말. 이쯤에서 끝나나 싶었는데, 웬걸. 이어지는 광주의 예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장구춤의 명인, 가야금 병창, 불교 무용 바라춤까지. 예향이라더니 빈말이 아니다. 출판기념회가 하나의 멋진 종합공연으로 만들어졌다. 신비로운 천불천탑 운주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사진가 박하선의 책, 천장

박하선은 대중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다큐멘터리사진가다. 주로 그에게는 항해사 출신 사진가라거나, 오지 전문 사진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그의 작업 전반을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수식어가 아니다. 사진가 박하선의 작업세계와 직접적으로 조우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집을 접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그 작품집 중에서도 <천장> 은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의 방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망자를 새들에게 보내는 그 순간은 참혹하고 황량하며 쓸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죽음인들 쓸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티베트인들에게 산다는 것 자체가 순례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박하선의 사진집 <천장> 은 표지부터 강렬하다. 호남대 미술학과에 재직 중인 서예가 목인 전종주가 쓴 제자 ‘天葬’은 표지 전체를 덮고 있다. 26쪽까지 이어지는 검은색 바탕은 어떤 전조와 같이 느껴진다. 티베트 고원의 광활한 풍광이 펼쳐지고 뭔가가 일어날 듯한 긴장감을 준다. 이윽고 백색 바탕에 티베트 사람들을 담은 흑백사진이 이어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과 승려들, 어디론가 들려가는 시체. 다시 배경은 검은색 바탕의 독수리 사진들. 이윽고 눈을 의심케하는 충격적인 천장 사진들. 시체를 찢고, 으깨고, 발라내 독수리의 먹이로 던지는 천장사의 손놀림에 심장이 뛴다. 그리고 다시 검은색 바탕으로 돌아와 티베트인들의 일상적인 포트레이트로 책을 마무리한다. 흑과 백의 바탕은 단지 사진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이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선의 이미지로 읽힌다. 책의 편집과 디자인이 사진 못지않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웅변하는 대목이다.

박하선이 천장을 취재한 것은 1997년의 일이었다. 이 작업은 처음에는 컬러였다. 이 작품을 가지고 프랑스 뻬르삐뇽에서 열리는 사진축제에 참여했다가 세계 여러 에이전시 담당자들로부터 흑백으로 작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아무래도 피와 살점의 붉은 색은 독자들이 보기에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2000년 다시 티베트를 찾아 흑백으로 전 작업을 다시 시도했다.

어렵게 현지 사원의 주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고, 주민들의 협조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가가 작업을 위해 누군가 죽기를 기다린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박하선은 “살과 피가 렌즈까지 튀어오르던 광경에 머리까지 쭈뼛했지만, 마지막 남은 육신까지 자연에 베푼다는 천장의 정신에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다른 문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작업으로 박하선은 세계적인 권위의 포토저널리즘콘테스트인 ‘월드프레스포토’의 일상부문 스토리에 입선하는 좋은 결과를 얻는다. 이 상의 뉴스부문에서는 과거에도 한국 수상자가 있었지만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강한 일상부문에서는 박하선이 첫 수상자였다.

사진집 <천장> 의 발행인인 ‘커뮤니케이션 와우’의 황유정씨는 “책을 만드는 우리에게도 도전이었습니다. 책에 실을 사진을 사무실 벽 전체에 걸어놓고 두 달에 걸쳐 편집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끔찍했던 사진의 장면이 점차 익숙해지더군요. 그리고 나름의 흐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라고 출판 뒷얘기를 전한다. 전문출판사가 아닌 디자인과 기획사업을 위주로 하는 ‘와우’에서 책 한권을 위해 정밀한 편집과 고급한 디자인, 완성도 있는 인쇄와 제본을 위해 큰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책을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출품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제작에 착수했다. “돈을 벌 지는 알 수 없지만, 화제는 될 것이다”라는 작가의 부추김도 한몫했다. 2002년 <천장> 이란 타이틀을 달고 박하선의 두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단번에 이 책은 출판가의 화제가 되었고, 10개월 만에 초판 발행 부수 1,000부가 매진됐다. 사진집으로서는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출품된 사진집이 현지 서점상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어 독일어판으로 재쇄를 찍었다. 다른 나라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제작된 사진집이 독일로 수출된 것은 분명 처음 있는 일인 듯하다.

만주로 가다

박하선은 지금까지 4권의 책을 상재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은 <삶의 중간보고서> 라는 책이다. 흔히 티베트 오지나 실크로드 전문 사진가라고 생각하다가 이 책을 보면 ‘어!’라는 의외의 감탄사가 나온다. 첫 책을 만들 때의 일이다. 오래전부터 아시아나항공 기내지에 기고해오던 박하선과 편집자였던 황유정씨가 만났다. 황유정씨는 이제 막 독립해서 ‘와우’를 차릴 무렵이었다. 그리고 둘은 사진집을 한권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사진을 가지고 올라갔는데, 편집진이 내가 내놓은 사진을 보고는 망연자실한 거지. 당연히 해외 오지사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 어떻게 하지 이런 표정이야. 가족들을 찍은 사진을 갖고 왔으니 말이요.” 박하선의 이야기이다.

“황당했어요. 박선생님의 사진을 볼 때마다 오지에서 느껴지는 어떤 힘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실크로드 어디쯤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황유정의 이야기다.

사진가로서의 첫 책은 내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우기는 작가와 ‘박하선표’ 사진은 따로 있다고 굳게 믿는 편집자와의 만남은 이렇게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결국 ‘와우’가 편집 및 디자인을 맡고 작가가 인쇄 등의 실비를 부담하는 것으로 박하선의 첫 책은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이 사진집이야말로 작가 박하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보이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배낭매고 무작정 여행을 다니던 때부터 배를 타고 오대양을 누비던 10년의 항해사 시절, 세계의 오지를 찾아 헤맨 20년을 스스로 돌아보는 박하선의 고백과도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책 <천장> 과 세 번째 책 <문명저편의 아이들> 로 다시 ‘박하선표’ 사진을 선보였다.

시간만 나면 중국으로 떠도는 필자도 자주 받는 질문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이 많고 못 찍은 게 많은데 왜 그렇게 오지로만 돌아다니느냐”는 질문에 박하선은 머리를 흔든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우리 것 아닌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나라 이야기는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봐야 해요. 예전에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사진은 그 국가들에 적대적인 서양 사진기자들의 눈으로만 봐야 했잖아요.”

하지만 최근작 <천불천탑> 은 ‘코 앞 동네’ 운주사에서 작업한 것이다. 박하선은 그를 규정하려는 외부의 시선을 멋지게 전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다음번 작업은 우리 상고사를 사진으로 엮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대형 카메라를 매고 만주벌판을 쏘다니고 있다. 만주벌판 오지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니 이번에는 어떤 사진을 선보일지 자못 궁금한 대목이다.

박하선은 이야기한다. “환갑이 되기 전에 책 10권을 엮을라고 합니다.” 10번의 단체전보다 한번의 개인전이, 10번의 개인전보다 한권의 책이 ‘더 힘이 쎄다’고 하는 그가 세운 인생의 목표다. 이제 6권이 남았다. 뱃사람의 뒷심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데 슬그머니 그 중 한권쯤은 내가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책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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