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9
중학생 때였으니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시골에서 면서기로 근무하는 외사촌형이 내게 특별한 부탁을 하나 했다. 미국에 사는 누님께 연락하여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해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카메라가 도착하여 그것을 들고 강화 외가집으로 배달을 갔던 적이 있다.
글│이규상 (눈빛 출판사 대표)
얼마 후 카메라가 도착하여 그것을 들고 강화 외가집으로 배달을 갔던 적이 있다. 지금처럼 택배가 있었다면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1970년대 당시만 해도 모든 물건은 소포로 부치거나 직접 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방학 중이어서 외할머니도 뵐 겸 도착한 카메라 박스를 들고 강화행 시외버스를 탔다.
그런데 호기심이 문제였다. 버스 안에서 그만 그 박스를 개봉해 보고 말았는데 지금의 아이폰 박스 두 배만한 크기의 박스 안에는 작고 깜찍한 카메라와 일회용 플래시 벌브가 몇 개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20리 시골길을 걸어가면서 그 카메라는 완전 나의 소유가 되었다. 비록 필름이 장전돼 있지는 않았지만 파인더를 통해 들여다보는 풍경은 신비롭게 다가왔고, 셔터 소리도 경쾌했다. 생전 처음 만져 본 카메라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것은 코닥(KODAK) 인스타매틱 X-30 카메라였다. 렌즈 f11/43mm, 전자식 셔터 1/125-10초, 필름 사이즈 126, 정가 38불.
저렴한 대중용 카메라였는데 외사촌형이 그 카메라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 기억에 없다. 아마 현장 보고용으로 쓰다가 후에 대량 수입된 35밀리 야시카 카메라로 바꾸면서 그 카메라를 최초의 개봉자인 내게 주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1%가 되었다는 외사촌형이나 가난한 사진출판을 하고 있는 내가 처음 접했던 카메라는 공교롭게도 미국 로체스터에서 만들어져 태평양을 건너온 코닥 카메라였다.
그 카메라를 만든 이스트먼 코닥 사가 창업 132년 만에 무너지는가 보다.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필름 생산을 중단하더니 지난달(2012년 1월) 파산보호신청을 냈다고 외신은 전한다. 이로써 필름 카메라 시장을 지배했던 20세기 사진 제국이 종언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 모양이다.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
만년에 척추협착증으로 투병 중이던 코닥 사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은 1932년 3월 14일 권총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독일 육군의 제식 권총인 루거 권총의 총소리를 듣고 황급히 2층 침실로 올라간 그의 여비서가 나이트 테이블 위에서 발견한 이스트먼이 남긴 마지막 메모에는 마치 자신과 21세기에 맞이할 코닥사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친구들에게 To my friends
내 일은 모두 끝났다 My work is done-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Why wait?
- 조지 이스트먼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가장으로서 보험회사와 로체스터 저축은행에 근무하던 조지 이스트먼이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8년 습판(wet-plate) 사진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유행하던 습판 사진술은 콜로디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합성유제를 유리판에 칠한 뒤 은탕에 담가서 감광성을 띠게 했다. 습판으로 촬영을 마친 사진사는 곧장 암실로 달려가 콜로디온 층이 마르기 전에 현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기법은 옥외에서의 사진촬영을 용이하게 하지는 못했다. 사진사는 무거운 장비들을 손수레에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마차형 암실을 이용했다.
이러한 습판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와 실험에 매달려온 조지 이스트먼은 드디어 1879년 건판(dry-plate)을 발명해낸다. 1880년 4월,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의 스테이트 가에 있는 건물의 3층을 임대하여 건판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리보다 더 가볍고 유연한 지지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실험을 계속해 종이에 사진유제를 코팅한 다음 그 종이를 롤 홀더에 감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1885년에 제작된 첫 번째 필름 광고에서는 “실외 촬영과 스튜디오 촬영 모두에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유리건판 대용품이 될 새로운 감광성 필름의 출시”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를 풍미한 플라스틱 롤필름의 초기 제품으로서 곧 흑백에서 컬러 필름으로 진화하게 된다. 코닥 필름은 사진뿐만 아니라 영화산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토머스 에디슨을 위해 영화용 필름을 만들었고, 뤼미에르 형제, 조르주 멜리에스 등 초기 영화 제작자들도 모두 코닥 필름을 썼다.
조지 이스트먼은 필름뿐 아니라 인화지, 카메라 분야에도 뛰어들어 그의 바람대로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생산하게 된다. 가격이 비싸고 일반인들이 다루기 어려웠던 카메라를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다 하겠습니다”라는 광고문구처럼 단순화하고 소형화한 코닥 카메라로 개선했다.
탁월한 경영자요 사회사업가였던 조지 이스트먼은 그 이전에 이미 필름, 인화지, 카메라 등의 사진기재를 밤새워 손수 개발한 발명가였으며, 사진문화를 대중화한 사진산업의 선구자였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개발해 냈듯이 아날로그 시대의 아이콘 조지 이스트먼은 필름(영화용 필름도 물론)과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20세기 사진산업의 종가 코닥
코닥(KODAK)은 단지 상품명이 아니라 명실공히 20세기 현대성을 상징한다. 코닥의 역사는 그대로 20세기 사진의 역사, 시각문화의 역사였다. 일본의 후지, 독일의 아그파 등이 있었지만 코닥은 20세기 내내 세계 필름시장을 주도했다. 그런데 코닥을 위협하는 진정한 경쟁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등장했다.
1981년 일본의 소니는 필름 대신 ‘촬상소자’로 영상을 기록하는 카메라 ‘마비카’를 발표했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의 개막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21세기에 ‘디카’를 넘어 ‘폰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성기 때 1백 달러에 육박하던 이스트먼 코닥 사의 주가가 순식간에 10달러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기존 주력제품이던 필름시장의 잠식을 우려해 적극적인 개발과 마케팅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객과 시장을 읽지 못했으며, 시대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방만한 경영으로 위기를 자초했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아마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견지했던 조지 이스트먼이 살아생전에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였다면 코닥의 전성기는 지금도 지속되지 않았을까.
작년 서점가의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스티브 잡스의 전기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조지 이스트먼의 전기가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책의 운명도 사람의 운명과 같아서 우리는 성공한 자들만 기억하려 든다.
코닥의 파산신청을 보면서 과학기술을 향한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디지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코닥과 함께했던 나의 아름다운 아날로그 추억은 아직 파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