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28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듬성듬성 뺨부터 턱까지 내려온 그의 잿빛 수염은 그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살짝 머금은 미소와 부드러운 눈매까지 강렬한 첫인상과 다르게 그는 만나는 사람들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타인이 좀 더 다가가기 쉬운 편한 말투를 가지고 있으며, 동네 아저씨와 같은 수더분한 그 만의 느낌도 그 재주를 돋보이게 한다. 대학로 사진 까페에서 그가 대뜸 맥주 한 병을 건넨다. 시원한 목넘김을 뒤로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1985년, 카메라를 달랑 메고 바다건너 일본에서 사진 공부를 했다. 그리고 히피처럼 온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그가 떠돌아 다니며 남긴 것은 바로 사진. 그에게 사진은 세상을 뜨겁게 사랑한 그의 열병의 흔적과 같은 것이라 그는 담담히 말했다.
20년을 한국과 외국을 건너다니며 남긴 그 열병의 흔적들은 그에게 많은 것들을 남겨 주었다. “사람이란 흙에 뿌리 내린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우주에요.
그리고 그 허공에 뿌리를 내린 존재이죠. 사람의 다리는 더듬이와 같아 나는 그 더듬이로 지구촌을 더듬으며 돌아다니게 되는 족속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멋진 곳이 어디었냐고 묻는다면 사랑에 빠졌던 곳이라고 답을 하지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술이다.
내가 건네준 DC 책자를 한 손은 받치고, 한 손은 책장을 넘기던 그가 몇 장의 사진을 보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꺼내 든다. 디지털카메라를 전문적으로 다룬 DC를 보더니 내심 놀라운 모습. 그는 이번 책, [나는 사진이다, 다빈치 2005]에 소개된 자신의 사진들의 절반은 필름카메라로, 절반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라 했다.
책 속, 그의 사진은 크게 인도와 몽골의 여행사진과 그가 만난 국내의 소소한 풍경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기 수급이 쉬운 인도의 사진은 캐논의 디지털카메라인 EOS-1Ds를 사용했고,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몽골의 사진은 필름카메라로 촬영했다.
좋은 카메라를 물어보는 이들에게 그는 반문한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카메라, 1등인 카메라가 있는 것인가? 나도 궁금하다. 그의 친구 중 하나가 만주 촬영을 위해 카메라 4대를 가지고 간 적이 있다.
최신 Canon 카메라 두 대와 그때 당시의 화제의 카메라 T-90, 그리고 항상 목에 걸었던 라이카 M시리즈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도착한 만주는 영하40도의 너무도 추운 날씨였다. 모터 드라이브를 돌리던 필름은 모두 끊겼고, 배터리도 얼어 못 쓰게 되었다.
남은 카메라는 목에 걸었던 라이카 M시리즈, 품속에 넣었다가 사진을 촬영할 때만 꺼내서 조심스레 셔터를 돌리고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그의 친구는 만주 사진을 마감기한 내에 가져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좋은 카메라는 바로 작은 카메라이다.
그가 서울의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EOS-1Ds를 가져 나간 적이 있다. 한참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전원이 나갔다.
100장 정도 밖에 촬영을 못 했음에도 추위에 약한 디지털카메라 배터리에 적색 등이 들어온 것. 이런 때는 주변 문방구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건전지도 들어가는 카메라가 가장 좋은 카메라 일 수도 있다. 카메라는 해상도를 표현하기 위한 장비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장비다. 해상도가 좋은 사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노이즈를 주거나 거칠게 인화해서 독특한 분위기의 사진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다. 디카든 필카든 표현의 도구일 뿐, 사진이라는 똑같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도구는 각각의 특성이 있고, 목적에 따라 적절한 카메라를 사용하면 된다. 이 카메라만이 진정한 카메라라거나 저 카메라만이 참 카메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시간 낭비인 시대가 왔다.
그는 5년 전부터 Canon의 파워샷 G1을 사용해서 인터넷에 디카 일기를 써왔다. 그 전에도 물론 사진 일기를 썼지만, 그때는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을 하고 글을 썼을 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G1은 찍고 나면 바로 컴퓨터에 연결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쇄 원고로도 쓸 수 있는 장점 덕에 디카의 화소가 300만이 넘기를 기다렸다가 G1을 선택 한 것. ‘디카포리즘’이라고 들어보았는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그가 말을 잇는다.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아포리즘이라는 뜻, 그가 만든 말이다. 디지트 DIGIT 라는 말은 사람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것에서 유래한 것, 아날로그와 상대적인 개념인 이 말은, 임의의 시간에서의 값이 최소 값의 정수배로 되어 있고 그 이외의 중간 값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간단히 설명을 덧붙인다. ‘1이거나 2이어야지 1과 2 사이의 어중간한 값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죠.’ 아포리즘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글이다.
보통 얘기하는 말로 금언, 격언, 경구, 잠언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근데 디지털카메라로 아포리즘을 표현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그가 얘기하는 디지포리즘은 디지털카메라로 시간의 일부를 기록한다는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계속해서 흘러만 가는 시간 중에 한 부분을 잡아내 기호로 표현한다. ‘흘러가는 시간들의 디지털화(化)’ 이 것이 그가 말하는 디지포리즘의 기본이다.
부산의 사진 전문 화랑이던 ‘스튜디오051’이 있었다. 사진작가 김중만이 [Man's Land] 전시회를 치루기도 한 그 곳. 그가 운영하던 스튜디오이자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 곳을 방문했던 사진작가 김중만은 “나를 압도한 것은 그의 무지막지한 작업량이었다. 필름 북이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프린트 역시 산더미 같았다”라고 회고한다.
카메라 하나를 달랑 메고 세계 60개국을 떠돌던 그가 한국에서 자리 잡았던 공간, 그의 부산 사랑은 남다르다. 부산의 화려하고 수수한 모습을 그는 그 만의 모습으로 카메라 앵글에 옮겨 닮는다. 그 작업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졌다.
사진 속에서 그는 해가 쨍하게 뜬 영도다리를 거닐다가 어느샌가 황령상 중턱에서 삼각대를 들고 있고, 남포동의 piff광장 위 까페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다.
또한 새벽이 되면 문현동 곱창골목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술 한잔을 기울인다. 그의 부산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보면 그의 부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의 기획전은 모두 부산과 관련한 작업이었다는 것도 독특하다. 매그넘을 꿈꾸며 그가 이끌고 있는 사진집단 ‘일우’도 해운대 옆 달맞이고개에 그 거처를 정했다.
해운대와 오륙도가 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다락방이 있는 작은 작업실 일우당으로 옮겨 사진 작업과 글쓰기를 즐기며, 때로 찾아오는 선객들과 차를 나누며 소일하며 지낸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스튜디오051? 그에게 조심스레 스튜디오 이름을 묻자 그가 간단히 반문한다. “부산광역시 전화 지역번호가 몇 번인지 아세요?”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몇 명의 남자들에게 누드촬영 강의를 부탁 받았다. 매주 한번씩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누드모델과 함께 촬영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덕망이 있는 사람들의 부탁인지라 흔쾌히 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첫 강의에서 그들은 벌거벗은 누드모델 앞에서 쭈빗거리기 일쑤였다. 그들이 모델과 대화를 하면서 몸의 구석구석을 렌즈에 담고, 몸이 가진 아름다움에 몰입하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누드사진촬영을 하던 그들은 누드 사진 촬영대회에 나가고 싶어했다. 자신이 닦은 기량을 외부 사람에게 평가 받고 싶었던 것, 그러나 모처에서 주관한 누드촬영대회에 나갔던 그들은 모두 실망을 하고 말았다.
한 모델당 40-50명이 따라 붙어 서로 밀치고 당기며 자리싸움을 했고, 어디선가 모델을 향해 날아가는 포즈 주문에는 욕설이 섞여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누드촬영도 중단되었다.
그는 너무도 아쉬워했다. 모델도 당당한 직업임을 인정하고, 옷을 벗은 사람에게도 교양과 인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음을 그들은 몰랐다.
그것은 존재로서의 인격적 예우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누드 사진은 육체가 가지는 존재감, 그리고 그 존재의 짦은 물질적 생명에 대해 심각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가 생각하는 아마와 프로의 가장 큰 차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느냐의 차이다. 손떨림, 초점, 그리고 노출. 이 것은 필자가 오랜기간 배워온 사진 이론의 기본과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나 프로들은 그 세 가지를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자금이 될 만한 한 가지 컨셉을 가지고 찍는 이들을 프로로, 그와 대립되는 것을 아마로 구분짓는 관점이 상당수 존재한다고 얘기하자, 그가 프로페셔널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일관성 있게 풀어낸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자신의 의도한 바를 카메라란 매개체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성 담긴 시선으로 보여준다는 것. 그 것이 사진이 아니던가. 한참을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진을 찍는 행위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버렸다. 나는 곧 그에게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독수리 앞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는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을 촬영한 케빈카터가 너무 젊었음에 안타까워했다.
그가 너무 젊은 나이에 겪은 그 갈등을 해결하기에 그에게는 철학적 내재성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사람을 구하는 신념과 집단과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 그 사이의 갈등. 전쟁을 증오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며, 전쟁 사진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한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이념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사진은 사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같은 사람의 무게라도 개인이 더 무거운지 집단이 더 무거운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면 집단이 개인보다 우위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가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그는 요즘도 처음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찍어 오십시오”라고. 사진을 꽤 한다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무엇’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 ‘무엇’이 곧 그 사람의 관심사이고, 그 사람의 관심사는 곧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 들이 촬영해 온 사진을 보고 관심사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요즘은 같이 출사를 나가고 실력이 나은 이가 실력 자랑을 하고 카메라 자랑을 한다. 그가 생각하는 사진의 커뮤니케이션은 동질감과 같다.
그 것은 사진을 찍은 자와 사진을 보는 자끼리 통하는 동질감이며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잘 이해하고 배려하여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그 것은 그가 원하는 일이다. 사진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그는 오늘도 독특한 그 만의 따스한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