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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사뿐사뿐 따삐르’에 발걸음을 맞추다

김한민 | 2013-04-12


‘따삐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의 존재를 낯설게 느낄 것이다. “얼굴은 코가 좀 짧은 코끼리 같고, 몸통은 돼지 비슷하고, 눈은 코뿔소와 닮은 동물”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일까도 생각하게 된다. 따삐르는 남미와 동남아시아에서 생활하는 포유류를 부르는 현지어로, 영어로는 테이퍼(tapir)라고도 한다. 그래픽 노블 작가와 전시 연극의 해설자, 문화 공간 숨도의 디렉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온 김한민 작가가 이번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따삐르를 소개했다. “이제 곧 따삐르의 시대가 올 거에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뿐사뿐 따삐르’를 만났다. 커다란 몸집에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랑스러운 따삐르. 이러한 따삐르 못지 않게 시종일관 동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줬던 김한민 작가.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맞다면, 따삐르와 김한민 작가는 어쩌면 가장 닮은 좋은 친구일지도 모른다.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자료제공 | 비룡소

지난 11월 출간된 ‘카페 림보’ 이후 약 4개월 만에 새로운 책으로 김한민 작가가 돌아왔다. 그동안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의 카페 레지던시 및 전시 연극 ‘카페 림보’를 선보였으며, 한겨레 신문에서 꾸준히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레지던시 기간 작성한 ‘카페 림보 연극 일지’는 조만간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기도 하다. 쉴 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할 것만 같은 그는 남들에 비해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일까, 아니면 마감에 대한 압박감이 덜한 것일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그에게 작업은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밥을 먹고 회사에 가서 일하듯, 그 역시 작업실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면, 작업에 대한 즐거움과 성실함이 그를 이끄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 역시 작업을 시작할 때의 두려움이 있지만,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는 의지가 더 컸다. 낭만적인 작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작업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만날 수 있다. 책을 만드는 작가로서, 3년 여 동안 문화 잡지 ‘1/n’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협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협업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제3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은 그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참여한 ‘눈먼 시계공’의 작업이나, 숨도의 디렉터로서 활동할 때도 잊지 않은 사실이다.

‘사뿐사뿐 따삐르’ 역시 작업하는 동안 그에게 즐거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작가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라고 밝힌 바 있는 따삐르를 소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한민 작가에게 따삐르는 모든 부분에서 매력적이었다. 특히 큰 몸집에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은 그에게 인상적인 기억이다.

책은 시끄러운 정글 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따삐르 모녀의 일상을 담고 있다. 꽃 한 송이, 개미 한 마리를 밟을까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따삐르 모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표범이 쫓아오기 시작한다. 빠르게 그들을 쫓던 표범은 사냥꾼에게 되려 잡힐 뻔하고, 그때 아기 따삐르가 표범에게 말한다.

“아저씨, 우리처럼 해 봐요.”

따삐르처럼 조심스럽게 걷던 표범은 다행히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게 되고, 다음날부터 다른 동물들도 사뿐사뿐 걷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다른 생명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따삐르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동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사뿐사뿐 따삐르’에 등장하는 따삐르, 코뿔새, 시아망, 호저 등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을 알고 관심을 갖는 것이 다양한 생물을 사랑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동물학자인 최재천 선생은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김한민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랑하면 조심한다.”고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듯, 동물들에게도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정글에 찾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다가올 수 없도록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러한 거리를 지키지 않아서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른 어떤 생명체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책의 그림을 살펴보면 익숙한 수묵기법을 사용한 것 같지만, 동물들에게 맞는 색과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해 인디언 잉크, 아크릴, 마카 등의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한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정글을 수묵으로 표현함으로써 동물들의 모습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했다.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해 책을 만드는 쉽지 않다. 김한민 작가는 어느 한 쪽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 수 있도록 작업하고 있다. 이는 글과 그림이 동시에 떠오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모든 내용을 생각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만들고 싶은 책 제목이 떠오르면 그의 작업은 시작된 것이다. ‘사뿐사뿐 따삐르’ 역시 처음에 떠오른 걷고 있는 따삐르의 모습과 제목이 출판까지 이어진 경우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과 그림책, 독자층이 비교적 정해져 있는 두 장르를 오가는 그에게 두 작업의 차이점에 대해 물었다. 이야기의 주제나 캐릭터에 따라 진행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작업에 임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동심이란 어린 시절의 장난스럽고 유쾌했던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반면, 그래픽 노블 작업을 할 때에는 좀 더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담아내려고 한다. 이번 책에서도 사냥꾼의 등장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무분별한 사냥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생명이 한데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김한민 작가의 다양한 시도와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만나볼 수 있다. 지난 2월에는 전시와 연극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전시 연극을 선보였다면, 오는 9월에는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없애는 새로운 실험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들과 어떤 작업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 밖에도 ‘양서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개구리, 도룡뇽, 영원 등 다양한 양서류가 등장하는 그림책과 서울시에서 최근 방사를 결정한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제돌이의 이야기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제가 예전에 탱고를 잠깐 배운 적이 있어요. 탱고의 시작은 여자 파트너가 스탭을 내딛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여자 파트너가 먼저 다가오면, 그때 비켜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리를 내주는 것이에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이 바로 서로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

‘사뿐사뿐 따삐르’의 따삐르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동물이다. 김한민 작가 역시 따삐르처럼 생명과 관계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그는 따삐르의 발걸음으로, 천천히 세상을 관찰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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