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6
미술과 검열의 역사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은「국가」에서 모든 예술은 이데아를 방해하므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칼뱅주의 교회는 예술을 철저히 ‘신앙의 시녀’로만 취급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예술의 자유는 끊임없이 시스템과 평론가, 관객들의 검열 대상이었다. 시대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이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뿐더러, 그렇다고 사회 시스템 역시 도발적인 작품들을 호락호락 용인할 정도로 무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싸움은 도발과 도주를 반복하는 톰과 제리의 지리멸렬한 접촉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예술가/검열관의 싸움이 없었더라면 미술사가 얼마나 지루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글 | 월간 퍼블릭아트 조숙현 기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역사적 전쟁 영웅일 뿐만 아니라 예술 검열 역사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시민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혁명을 이루어 냈으나 일단 혁명에 성공한 후에는 개인적인 탐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나폴레옹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교향곡 ‘영웅’을 작곡한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자 화를 내며 자필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 때 나폴레옹은 예술을 자신의 직위를 정당화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언론, 공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예술 아카데미를 철저하게 검열하였는데, 그의 독선적인 성격은 언론의 탄압과 현대 예술 공연 금지, 체제 비판적인 서적의 판금 조치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나폴레옹의 업적을 기리는 목적의 대규모의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지금 파리의 에투아르 개선문과 방돔 광장의 기념탑이 이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다. 그러나 그의 나르시시즘과 예술 검열의 이중성의 극치는 역시 초상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가 흔히 ‘나폴레옹’ 하면 떠올리는 초상화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으로, 그는 이 회화를 통해 나폴레옹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거친 풍파를 뚫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그의 비장한 얼굴에서 패배의 그림자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승리를 예감하는 붉은 옷자락은 펄럭이고 앞발을 한껏 처든 그의 애마는 금방이라도 백만의 적군을 쓰러뜨릴 듯 기세등등하다.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의 날씨는 승마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쾌적하고 화창했다고 한다. 또한 타고 있었던 것도 백마가 아닌 노새였다고 하니, 이제와 이 화가의 속이 얼마나 앙큼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의 황제 찬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으로 이어진다. 이 그림에서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이미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직접 왕관을 수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당시 교황은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나폴레옹의 오만함을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성격이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눈앞의 물건을 서슴지 않고 집어던질 정도로 불같았다고 하니, 이쯤해서 지나치게 야박하게 굴지는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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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대로 검열보다 무서운 대중의 여론으로 인해 미술계를 떠나야만 했던 비극적인 화가와 그림도 존재했다. 미국화가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는 파리에 머물면서 초상화
<마담 x>
를 그렸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내이자 사교계 최고의 미인 버지니 고트로였는데, 서전트는 애초에 화가로서 크게 성공하고 싶은 야욕 때문에 그녀에게 고의로 접근했다. 고트로는 그의 간청에 흔쾌히 승낙했고, 완성된 그림은 188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됐다. 그러나 그녀의 깊이 파인 드레스 목둘레와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특히 드레스의 한 쪽 끈이 내려가 있는 묘사를 보고 화단과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고트로의 가족들은 그녀가 이 그림에서 상류층의 요조숙녀가 아닌 천박한 창녀처럼 묘사되었다는데 격분하여 서전트에게 그림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어깨 끈이 제대로 달린 그림을 완성했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팔의 위치가 더 어색하게 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검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빗발치는 비난을 감수하지 못해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궁금증은 남는다. 정말 이 그림 한 장이 화가를 사회에서 매장시킬 정도로 도발적인 수준인가? 구스타브 쿠르베가 포르노에 가까운
<세상의 기원>
을 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렸던 것이 1866년이다. 그 후 쿠르베는 호색가라는 악명을 드높이고 페미니스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긴 하였지만 프랑스에서 퇴출되기는커녕 오히려 호색한이라는 악명을 즐기며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도대체 대중은 왜 유독 서전트와 그의 그림에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일까? 그가 그린 모델이 프랑스의 최고 상류층 인사였기 때문에? 아니면 그가 유럽인이 아닌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서전트는 그가 원치 않았던 방식이되
<마담 x>
로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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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누드>
는 나체의 여인이 가로로 길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회화인데, 모딜리아니는 이 작품을 1907년과 1912년 살롱도톤(가을 미술전), 1908과 1910, 1911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했고, 1917년 파리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단독전을 개최했다. 모딜리아니는 이 그림을 위해 전문 누드모델을 고용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고, 특유의 취향과 화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전은 개최된 지 단 몇 시간 만에 파리 경찰에 의해 폐쇄되는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대중들에게 그대로 선보이기에는 선정성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 경찰들의 출동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비친 이 그림은 뇌쇄적이거나 도발적이기는 커녕 여체의 신비로움과 함께 여인의 깊은 감수성을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에 앞서 외설스러움을 느낄 인간이 몇이나 될까? 아무튼 인류의 기억이 가뭇했을 무렵부터 시작된 창작자와 검열관의 취향의 크나큰 괴리는 이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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